2015년 1월 8일 ~ 1월 14일
땡스북스 금주의 책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 폐허를 걸으며 위안을 얻다
웅진지식하우스
제프 다이어 지음 / 김현우 옮김

막 이륙을 시작한 비좁은 비행기 좌석에 몸을 싣고 멍하니 창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활주로 군데군데 지저분하게 녹은 눈밭이 보였다. 건조한 기내 공기 탓에 목이 간지러워 고개를 젖히고 연신 마른 침을 삼켰다. 근 몇 주동안 사사로운 감정들이 뒤섞여 여러모로 매우 지친 상태였지만 지구 반대편을 날아오면서 이렇게까지 여행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우스웠다. 경유지인 벤쿠버의 다운타운 식당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음악을 들으며 망중한의 시간을 때워도 절벽 낭떠러지에 외로이 서있는 기분이 계속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는데, 지치고 시린 마음을 달래러 왔건만 구름이 잔뜩 낀 음울한 하늘에서 눈과 비가 차례로 쏟아지고 외투 주머니에서 맨손을 꺼내기가 두려울 정도로 추웠기 때문이다.
몇 시간 후, 숙소에 도착하여 짐을 풀자마자 14시간 동안이나 곯아떨어졌다. 스스로가 잠시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느껴질만큼 깊이 자고 나서야 눈을 떴는데 마치 숙면하기 위해 이 멀리 여행을 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개운했다. 그 단잠 이후 매우 평온한 상태에서 캐나다 청정 지역의 아름다운 설경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었고, 이 책의 저자 제프 다이어가 자신만의 폐허의 상태에서 진짜 ‘폐허’가 된 곳에서 위안을 받았다면 나는 폐허의 상태에서 캐나다의 눈밭을 거닐며 크나큰 위안을 얻었다.



이 책을 소개하고 싶었던 이유는, 마음의 ‘폐허’ 상태에서 여행을 떠난 경험이 있다면 그가 쓴 글에 녹아져 있는 진솔함에서 큰 공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 제프 다이어는 정신없이 살다 보니 어느새 중년이 된 자신이 꿈도 방향을 잃어버렸으며 심지어 그것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그런 자신의 상태를 '폐허'라고 선언했고, 세계 곳곳의 진짜 폐허를 찾아다니는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그 긴 여행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 바로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이다.

P.51
나는 침대에 누워 여행에 관한 오래된 질문에 사로잡혔다. 사람들은 왜 여행을 하는 걸까?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거기까지 생각하니 세 번째 질문도 이어졌다. 나는 삶에서 뭘 원하는 걸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자리를 잡고, 같은 곳에 머물며, 다리를 뻗고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 것. 적어도 리비아에 오기 육 개월 전에는 중년에 발목을 잡힌 게 아닌가 하는 느낌에 시달렸다. 과거에 욕심을 부리던 일들(활력, 새로운 것에 대한 욕망, 새로운 도전 같은 것들)이 줄어들고, 익숙한 것들을 계속 하고픈 바람이 커지는 것이 그 증거였다.

P.247
밖에 있으면 실내로 들어가고 싶었고 실내에 있을 때는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가장 심할 때는 일단 좀 앉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가, 자리에 앉자마자 일어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고, 그래서 일어난 다음에는 다시 앉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인생을 허비했다.



제프 다이어는 지구 곳곳에 흩어져 있는 폐허의 풍경을 빌려 소진되고 닳아버린 자신의 내면에 대해 이야기한다. 포털 사이트나 온라인 서점에서 이 책의 소개글만 접한다면 거창한 여행 에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에는 여행지에 관해 친절하게 설명하기보다는 오직 그 자신의 이야기와 여행지에서 마주친 사람들과의 이야기가 더 많이 담겨 있다.
제프 다이어가 영국인이라는 출신 성분을 의식해서인지는 몰라도 그의 문체가 다소 딱딱하고 냉소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픽하고 웃음이 터질만큼 유쾌한 묘사들이 많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P.144
마침 밖에서 누군가가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그는 화장실을 얼마나 오래 쓰는 거냐고,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거냐고 물었다. “좋은 질문입니다!” 나는 젖은 바지를 가방에 집어넣으며, 잔뜩 격앙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새 바지를 벗었다가 뒤집어서 다시 입는 일은 대단히 위험 요소가 많아 보였다. 안팎이 바뀌기는 했지만 어쨌든 입기는 했고, 나한테는 그 점이 중요했다


중년인 저자가 느꼈을 폐허와 이십 대의 내가 느낀 폐허의 온도와 무게는 아마도 조금 다르겠지만 누구나 살다보면 나이불문하고 스스로 ‘폐허’가 되었음을 인정하는 때가 온다. 그때 어두워진 내면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어디로든 잠시 여행을 떠나는 것은 폐허를 해소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쯤되면 여행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게 된다. 여행지에서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며 새로운 시각을 갖고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 이것이 여행이 주는 큰 위안인 것 같다.




저자: 제프 다이어
저자 제프 다이어 GEOFF DYER는 “영국 최고의 생존 작가” “국가적인 보물” “영국문학의 르네상스인” 등으로 평가받는 영국 최고의 논픽션 작가이자 소설가. 소설, 에세이, 르포르타주 등 여러 장르를 혼합하는 그의 독창적인 글쓰기는 세계의 많은 독자들은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 알랭 드 보통 등 동시대 작가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2004년 W. H. 스미스 가장 훌륭한 여행서 상을 수상한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YOGA FOR PEOPLE WHO CAN’T BEBOTHERED TO DO IT》는 여러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제프 다이어 특유의 글쓰기가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작가 스스로 실제로 일어난 일과 머릿속에서만 일어난 일이 섞여 있다고 고백하고 있듯이, 이 작품은 논픽션임에도 소설적인 재미와 감동이 함께 녹아 있다. 로마, 리비아, 캄보디아, 디트로이트 등 고대와 현대의 폐허를 방문하는 이 여행을 통해 그는 삶과 소멸, 자유와 행복, 그리고 진정한 위안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전한다.


글, 사진: 땡스북스 최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