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19일 ~ 6월 25일
땡스북스 금주의 책

낡은 것들의 힘
WORN STORIES
한스미디어
에밀리 스피백 지음/이주혜 번역

나는 이 책을 좋아한다. 물건을 잘 못버리는 내게 이 책은 면죄부를 줬다.

드레스든 스타킹이든 옷을 버리지 않고 보관하는 게 내겐 커다란 즐거움이다. 지난 20년 동안 신발 한 켤레도 버린 적이 없다. 내 옷도 알랭의 옷도 도무지 버릴 수가 없다. 늘 아직 입을 만하다는 핑계를 댄다. 옷은 나의 과거다. 너무 낡아 있어서 집어 들고 품에 꼭 안아 주고 싶다.
-루이스 부르주아, 1968년



이 책에는 67명 크리에이터들의 낡은 옷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각자 자신의 추억이 담긴 낡은 의류를 소개하며 그 속에 얽힌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그 중 한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데비멀린의
부드럽고 호화스러운
캐시미어 코트 이야기

그녀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아도 향기만은 기억한다. 베이비파우더와 한줄기 오렌지향이 묻어나는 야생화 냄새가 자극적으로 섞인 향기였다.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는 냄새였다. 25년 전이었고 그녀를 막 만난 때였다.

그녀는 그래픽 디자인 일로 어느 경기장에서 만난 잠재적인 고객이었다. 몸매가 날씬하고 우아했으며 팔이 가늘고 목이 길었다. 서투르고 통통한 20대 뉴욕 사람인 나는 그녀처럼 자신감이 풍겨 나오는 여자들 앞에 서면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그들을 흉내 내고 싶은 마음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 향수 이름을 묻자 파베르제와 비슷한 발음으로 뭐라고 했지만 파베르제가 아닌 것은 알았다. 파베르제의 향기는 잘 알았다. 여고생이라면 누구나 그 향수를 뿌렸으니까. 그건 솔직히 향수도 아니었다. 절대로 아니었다.

프로젝트를 따낼 수는 없었지만 그 향수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메이시 백화점에서 게속 찾아보았고 블루밍데일과 로만도 찾아갔지만, 소용이 없었다. 삭스 피프스 애비뉴 백화점에 갔지만 세련된 직원들 앞에서니 나 자신이 초라해 보이고 기가 죽어 선뜻 도움을 요청하기가 겁이 났다. 화장품 매장을 이리 저리 돌아다니고 있는데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다가와 혹시 화장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무엇을 도와 줄까 물었을 때 나는 목청을 가다듬고 혹시 파베르제와 비슷한 이름의 시트러스 향이 나는 향수가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녀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이내 표정이 환해 졌다. 그녀는 에르메스에서 새로 나온 향수 포브르를 말하는 것 같다고 했다. 혹시 어느 매장에 가야 그 향수를 구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며 삭스 백화점에서는 그 향수를 팔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몇 블록 떨어진 매디슨 애비뉴의 에르메스 매장에 가보라고 했다.



나는 매장까지 거의 달려가다시피 했다. 매장에 도착하자 제복을 입은 남자가 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이제껏 가본 곳 중 가장 우아하고 값비싼 환경으로 들어섰다. 이백달러짜리 스카프와 만 달러짜리 가방들이 유리 진열대에 깔끔하게 진열되어 있었고 빛나는 가죽안장이 벽에 걸려 있었다. 눈길 닿는 곳 모두가 정말 정말 부유해 보였다. 나만 빼고.

포브르를 발견했지만, 직원이 가격을 말했을 때 놀라 숨이 멎는 줄 알았다. 향수 한 병이 그만큼의 값어치가 있을 수 있는지 궁금해 하며 소심하게 한 번 뿌려 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향수가 내 피부에 닿자마자 나는 황홀경에 빠져 얼른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두 달에 한 번 E트레인을 타고 53번가로 가서 에르메스 매장까지 걸어가 리필을 했지만 다른 것을 살 여유는 없었다. 그랬던 게 1990년 7월 매장을 찾아갔을 때 상황이 달라졌다. 직원이 손짓해 나를 부르더니 속삭였다. “위층에서 선별한 제품들을 특별 할인하고 있어요.”

할인 판매라도 나는 물건을 살 여유가 없었다. 그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코트를 발견했다. 부드럽고 호화스럽고 무척 밝은 레몬색 캐시미어 코트였다. 옷깃이 크게 펄럭였고 허리에는 벨트가 있었다. 수천달러는 될 거라고 확신했다. 정말이었다. 2천2백 달러였다. 그런데 원래 가격에 X표가 그려져 있었다. 할인가는 4백 달러였다.

이만한 비용이 내 예산에 어떤 의미일지 계산해 보았다. 주저하지 않고 코트를 입어 보았다. 적어도 한 사이즈는 컸다.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매혹적이고 아름답게 느껴 졌다. 점원이 이제껏 본 중 가장 큼직한 주황색 가방에 코트를 담아 주었을 때 나는 이게 절대로 실수가 아님을 알았다. 나는 이 코트를 영원히 입을 작정이었다.
정말로 나는 영원히 입었다! 9월부터 3월까지 매일 입었다. 일하러 갈 때도 입었고, 주말에도 입었고 버몬트로 휴가를 떠날 때도 입었으며 서해안으로 여행을 갔을 때도 입었다. 더 따뜻한 코트가 있으면 좋겠다고 바랐던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중략)

글을 읽는 내내 마치 영화를 보는 듯 화면이 펼쳐 졌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인간적인 이야기들인 동시에 그들만의 예술적 취향이나 가치관이 드러나는 에피소드들이어서 더욱 흥미롭다.






“이 책의 의도는 간단하다. 다양한 사연을 통해 참여자들의 삶을 엿볼 수 있고 또 자신의 옷이 내가 중고상점에서 목격했던 그 익명의 옷더미에 던져지기 전, 삶에서 어떤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돌이켜볼 계기가 될 것이다.
우리를 지켜주고 웃게 하고 제복의 역할을 하고 정체성이나 열망을 나타내는 옷,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해 입는 옷, 이 모든 옷에는 우리네 삶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우리는 입었던 옷 속에 새겨진 축소된 삶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한 이야기들을 세상 빛 속으로 끄집어내는 게 이 책의 목적이다.”
-머리말 중에서–



사실 모든 추억을 끌어 앉고 살수는 없다. 효율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더더욱 당해 낼 재간이 없다. 하지만 요즘은 너무도 빨리 소비되고 많은 것이 버려 진다. 그러면서 개인의 기억과 낡고 오래된 것들의 의미도 같이 버려 진다. 효율성이 좀 떨어져도 내가 감당할 수 있고 즐겁다면 내 잣대가 옳은 것이다.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각자에게 소중한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이 사랑스러운 것처럼 말이다.




지은이: 에밀리 스피백
저자 에밀리 스피백 EMILY SPIVACK은 브루클린에서 활동하는 예술가이자 작가, 편집자로 스미소니언의 매거진 블로그인 ‘스레디드’를 만들어 인터넷 기반 예술프로젝트인 ‘센티멘털 밸류’를 위한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있다. 그녀의 작품은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워싱턴포스트]에 실렸다.

옮긴이: 이주혜
역자 이주혜는 서울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졸업. 번역은 냉정한 저울질로 한쪽 팔엔 원작자를 또 한쪽 팔엔 독자를 올려놓고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침 없이 공정한 번역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현재 번역 에이전시 하니브릿지에서 출판기획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글, 사진: 땡스북스 이기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