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7일 ~ 7월 13일
땡스북스 금주의 책

알랭 바디우, 오늘의 포르노그래피
북노마드
알랭 바디우 저
강현주 역

솔직히 말하면, 전 이 책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모르길 바랐습니다. 분홍색 표지에 포르노그래피란 제목 때문에 골랐는데, 제가 기대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대신 우리가 지켜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민주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잘 이해가 되지도 않았고, 불편했습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바디우는 이런 말을 하나.
제 불편함을 해결해 준 건 바디우의 약력이었습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좌파 철학자”, “마르크스주의에 바탕을 둔 구조주의(알튀세르)와 혁신적 정신분석(라캉)을 접목”, “68혁명 이후 마오주의 운동에 투신”. 민주주의를 비판하기에 얼마나 자연스러운 약력인가요. 바디우는 실패한 공산주의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 같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민주주의를 비판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마음이 편한 채로 책을 덮었다면 이 글은 두 번째 문단에서 그쳤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 번째 문단이 시작됐으니, 전 다시 불편해진 것이겠지요. 책의 해설에 나온 어떤 문장 때문입니다.


P.106-7
그래서 바디우는 ‘자아’에 대한 모든 개념을 버릴 것을 요청한다. 주체와 의식은 같지 않다. 의식은 단순히 동물 인간의 삶을 반영할 뿐, 체계 안에서 찾아오는 사건과 그것의 진실, 신념을 보지 못한다. 의식만으로 우리는 주체에 다다를 수 없다. 나에게 갑자기(그러나 이미 진행 중이었던) 사건을 내 안에 끌어들이는 것은 자아 혹은 육체로부터 떨어져나가는 과정을 겪을 때 가능하다. 나를 넘어설 때 나는 사건을 볼 수 있고, 사건에 충실할 수 있다. 주체는 개인이 아니다. 개인이 자아를 넘어설 때 주체가 되는 것이다.

넌 지금 의식으로만 이 책을 판단하고 있어. 진실은 그 너머에 있어. 사건을 받아들여 너는 너를 넘어설 수 있어? 주체가 될 수 있어? 문장은 그렇게 묻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제가 제 자신과 사람들에게 자주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잘 물으며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문장은 문장을 살아 낼 때 진실이 됩니다. 어떻게든 문장을 진실로 만들고 싶어 저는 다시 책을 읽기로 했습니다. 이 책을 하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여 보기로요. 자아 혹은 육체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제 의식을 책에 부딪혀 보기로 했습니다. 지금부터 나머지 글은 그 충돌의 기록입니다.


P.35-6
오늘날은 민주주의자라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감상적인 의무감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를 파괴하는 맹렬하고 벌거벗은 권력은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뒤집어쓰자마자 모두의 인정을 받고 심지어 사랑받게 됩니다. 마치 경찰서장이 발기된 성기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모두의 욕망을 희망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이 의무감이나 사랑을 조리 있게 다뤄야 합니다. 일단 우리의 영혼에서 민주주의를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떼어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결론은 매우 암울할 것이고, 현재는 조만간 최악으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바디우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제도로서의 민주주의입니다. 국민이 자신을 대신해 권리를 행사할 정치인을 선거로 뽑는 대의제 민주주의 말입니다. 바디우는 이 대의제 민주주의, 즉 지금 한국이 형식적으로 거의 완성시켰다고 보는 정치체제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현재를 통째로 거부당하는 느낌이라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만, 어쩌면 바디우의 말처럼 저는 민주주의를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디우가 보기에 대의제 민주주의는 시장자본주의와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장자본주의는 책에서 인용한 희곡의 배경인 유곽과 같습니다. 화려하고 외설적인 이미지들로 가득한 포르노그래피의 공간인 유곽을요. 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에 포르노그래피가 들어 있는 것이지요. (억울할 게 하나도 없는데 왜 억울할까요.)
현재 우리 주위에 포르노그래피의 이미지들이 많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광고를 비롯해 많은 매체가 전달하는 이미지 대부분이 화려하고 외설적입니다. 어떤 반성도 없이 말초신경만을 자극하는 이미지들은 바디우의 말처럼 “우리를 1940년대와 비슷한 사물들의 상태 -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전적인 약동의 지배 - 로 끌고”(41쪽)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다행히도 요즘 위험함을 느낀 사람들이 늘면서 시장자본주의를 건강하게 바꿔 보자는 분위기가 커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디우는 저를 한 번 더 불편하게 합니다.


P.42-3
이 비판에 큰 목소리로 앞장서는 사람들은 이 자본주의를 현명하게 개혁하자는 주장으로 언제나 귀결됩니다. 그들은 적절하게 규제된 자본주의, 포르노그래피적이지 않은 자본주의, 생태 자본주의, 언제나 더 민주적인 자본주의를 제안합니다. 요컨대, 결국 모두에게 편안한 자본주의, 즉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공상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유일하게 위험하고 급진적인 비판은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적 비판입니다. 현재 시간의 상징물, 이것의 물신, 이것의 남근이 바로 민주주의이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민주주의에 대한 고도로 창의적 비판을 끌어낼 수 없다면, 우리는 이미지들로 가득한 유곽에 머무르게 되고 정체될 것입니다. 우리는 유곽의 여주인과 경찰서장으로 이루어진 짝, 즉 소모적인 이미지들과 벌거벗은 권력으로 이루어진 짝의 하수인이 될 것입니다.

평소에 진보적이라 믿었던 생각들이 바디우 앞에서 공상이 되었습니다. 자본주의의 문제니 자본주의를 개혁하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바디우는 다른 곳을 가리킵니다. 그의 손끝은 민주주의를 지목합니다. 첫 번째 독서에선 무참함에 책을 덮었지만, 지금은 두 번째 독서니 조금 다르게 행동했습니다. (조금은 제 자신을 넘어선 것 같다 말하면 돌이 날아올까요.)
바디우의 말은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전 그의 말을 검증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민하다 그냥 두기로 했습니다. 바디우의 말을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는 무언가로 비워 두기로요. 판단을 미루니 이상하게도 무참하지 않더군요. 바디우를 철 지난 공산주의자로 판단하고 책을 덮어야만 무참함이 해결되는 줄 알았는데요.
그렇게 바디우의 손끝을 바라볼 수 있게 됐습니다. 바디우는 민주주의를 넘어 결국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요.



P.47-8
“자유, 인민, 덕Vertu에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사람들이 이것들을 칭송한다면 어떻게 이것들을 사랑할 것인가! 만일 사람들이 이것들을 건드릴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면? 우리는 이것들을 그 생생한 현실 속에 그냥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시와 이미지를 준비한다면, 그것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무기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으나 늘 조금밖에는 알고 있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예속된 욕망을 전혀 채워주지 않는 이 시와 이 이미지를 준비합시다. 현재에 대한 시적인 벌거벗음을 준비합시다.

우리가 준비해야 할 시와 이미지는 채워진 무언가가 아니라 무기력하게 하는 무엇이라는 말. 이 말은 해설의 한 문장과 맞닿습니다.

P.95
바디우의 수학적 방법론은 무한히 해체될 수 있는 다양성은 비움에 이르게 된다는 것, 즉 다양성은 비움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깨우쳐주었다.

공산주의를 가리키는 줄 알았는데, 바디우는 비워지는 이미지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마르크스를 정치적 진리의 모든 구축의 중심에 일차적으로 두는 것 (…)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는 것이며, (…) 해체되어야 하는 실재에 대한 이미지군의 관계”(32쪽)라는 말처럼, 그는 진리로 여겨지며 중심에 못 박히는 무언가를 모두 비판하는 것 같습니다. 저를 비롯한 누군가에겐 민주주의겠고, 누군가에겐 공산주의겠지요. 바디우는 그 이미지들을 모두 무기력하게 만들 이미지를 준비하자고 합니다. 그저 비어 있는 이미지, 잠시 채워질 수는 있어도 언제든 비워질 수 있는 이미지를 말하는 걸 겁니다.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모두 채워졌다, 비워지는 그런.
어쩌면 그렇게 계속 비워지는 이미지가 민주주의고 공산주의 아닐까요. 민주주의만이, 공산주의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곳에, 자유가 있고 평등이 있을 리 없으니까요.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바디우가 비판한 것은 진리로 굳어진 민주주의 제도인 듯합니다. 민주주의 제도와 민주주의 가치는 다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가치는 공산주의 가치와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나의 굳어진 체제 안에서 적대시 되는 다른 체제의 가치를 상상하는 힘이 비워지는 이미지에는 있습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자유롭고 평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비워지는 이미지에 힘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아직 잘 모르겠고, 바디우도 이 글에서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저는 이 방향을 믿습니다.

우리는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다만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보지 않을 뿐입니다.
(<레비스트로스의 말>, 마음산책.)

불안하지만 황홀한 마음으로, 바디우와 같은 방향으로 가 보려 합니다. 아니 이미 우리는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저자 : 알랭 바디우 Alain Badiou

1937년 모로코 태생으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참여 지식인이자 좌파 철학자이다. 처음에는 사르트르주의자였으나 고등사범학교ENS 시절 알튀세르를 만나 제자가 되며, 동시에 라캉에게서도 지적 자극을 받는다. 렝스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다가 프랑수아 레뇨를 만나, 마르크스주의에 바탕을 둔 구조주의(알튀세르)와 혁신적 정신분석(라캉)을 접목한 잡지 『분석을 위한 노트』 편집진에 참여한다. 이 잡지에 참여한 장클로드 밀네, 자크알랭 밀레 등의 지식인들처럼 바디우 역시 68혁명 당시 중요한 역할을 한 마오주의 운동에 투신한다. 파리8대학과 고등사범학교 교수를 지냈다.

바디우는 탈현대에서 근거를 부정당한 주체, 진리, 세계에 대한 재정초를 시도하고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철학 저술을 시작한다.『주체 이론』(1982)은 명백히 라캉의 주체 개념에서 영향받은 저술이며, 1988년에 발표한 주저 『존재와 사건』(1988)은 전통의 존재론을 수학적 존재론으로 이행시키고 여기에 주체를 관통하며 주체에 의해 선언되는 사건을 연결한다. 그 밖에 『철학을 위한 선언』(1989), 『사도 바울』(1998), 『세계의 논리들-존재와 사건2』(2006), 『사랑 예찬』(2011) 등의 철학서와 다양한 정치 팸플릿 및 시론을 발표했으며, 여러 편의 소설과 희곡도 썼다. 바디우의 일관된 화두는 ‘과학에 근거를 두는 혁명적 해방의 사유’이며, 1985년 프랑스 코뮌주의자연맹을 잇는 포스트레닌-마오주의 단체인 ‘정치조직’을 창설해 활동하는 등 여전히 정치 참여도 멈추지 않고 있다. 현재 그는 《존재와 사건》의 제3권인 《진리들의 내재성》을 집필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진리의 관점에서 존재와 출현의 문제를 다룰 예정이다. 이외에도 『바디우와 지젝 현재의 철학을 말하다』(공저)등을 집필했다.

저자 : 강현주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불어 및 영어 전문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나는 왜 이유 없이 아픈 걸까』 『마음의 치유』 『인간관계의 심리학』 『산은 내게 말한다』 『내 인생의 자전거』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차 한 잔』 『아이의 진실』 『커피(ABC 시리즈)』 『사랑의 속도를 늦추어라』 『고스트 컴퍼니』 『엄마,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이름』 등이 있다.

글: 땡스북스 이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