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4일 ~ 9월 10일
땡스북스 금주의 책

봄에 나는 없었다
포레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넌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하느님 감사합니다 - 불쌍한 블란치 - 제가 그 여자와 다르다는 데 감사드립니다 - 큰 은혜를 - 제가 받은 모든 축복이 - 특히 불쌍한 블란치 같지 않다는 것이 - 불쌍한 블란치 - 정말이지 끔찍합니다. 물론 그녀의 잘못이고 - 끔찍한 - 몹시 충격적인 - 감사합니다 - 전 다릅니다 - 불쌍한 블란치 ......
조앤은 어느덧 잠이 들었다.

어쩜 이런 자기소개가 있을 수 있을까? <봄에 나는 없었다>의 주인공 조앤은 위의 기도로 소설의 첫 장을 마무리한다. <봄에 나는 없었다>는 1장에서 "조앤"이란 캐릭터를 친구인 블란치와 나누는 대화로 얼마나 오만하고 자기만족에 빠진 인물인지를 설명하며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특히 개인적으로 저런 내용의 감사 기도를 하며 "어느덧" 잠에 드는 주인공에 신기하기까지 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속물스러운 인물인지 대번에 알 수 있다 못해 소설 속 주인공을 한순간에 경멸하게 만드는 구절이었다.
"아니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지난 7월, 황금가지 출판사의 장르문학에 대한 전시를 준비했을 때 벽면을 장식한 메인 도서가 애거서 크리스티 애디터스 초이스였다. 고등학생 때 장르문학에 빠져 애거서 크리스티와 애드거 앨런 포우 등 추리소설을 열심히 읽었던 때가 생각났었고 그때 읽었을 때와는 다르게 훨신 세련된 디자인으로 나온 애거서 크리스티의 책들에 반가움을 느꼈었다. 매니저님께 애거서 크리스티를 좋아했다고 넌지시 말을 하자, 내게 이 책으로 인해 애거서 크리스티에 대한 인상이 바뀌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봄에 나는 없었다>를 추천해주셨다. 나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완벽한 팬(?)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가 추리소설이 아닌 소설을 썼었다는 사실을 처음 접하고 신선하게 느꼈으나 잠시 잊었다가 문득 떠올라 읽게 되었다. 뒤표지의 책 소개마저 읽지 않은 채 시작했는데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읽었다.

p.24
"지은 죄에 대해서라면 언제든 생각할 수 있지!"
"맞아, 그래." 조앤은 내키지 않았지만 예의상 맞장구쳤다.
블란치는 그녀를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너라면 그 일을 오래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러고는 인상을 쓰면서 불쑥 말을 이었다.
"그러다 선행에 대한 생각으로 넘어가겠지. 그리고 네 인생에 주어진 축복들을 생각할 테고! 흠......모르겠다. 좀 지루하지 않을까. 궁금하네......블란치는 잠깐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몇 날 며칠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자신에 대해 뭘 알게 될까......"
조앤은 의심스러우면서도 약간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전에 몰랐던 것을 알게 될까?"

애거서 크리스티는 "메리 웨스트매콧"라는 필명으로 6편의 장편 소설을 발표한다. 그녀는 필명을 50년 동안 비밀에 부쳤는데 이유는 추리작가로 유명했기 때문에 추리소설 독자들을 혼동시키지 않기 위함이라고 한다. 비단 나만 하더라도 그녀의 이름은 바로 추리소설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에 그녀의 배려가 이해가 되었다. 여성의 고독, 사랑의 오만함과 잔인함에 대한 특유의 날카로운 성찰을 담은 장편들 중에서 중년의 여인이 자기기만적인 삶을 깨닫고 무너져내리는 과정을 그린 <봄에 나는 없었다>는 숨은 걸작으로 평가받는 소설이다.

주인공 조앤은 영국의 한적한 타운에 사는 지역 변호사의 아내이자 삼남매의 어머니로 활기찬 삶을 살며 완벽하고 행복한 삶을 산다고 자부한다. 우리나라 말로 현모양처의 꿈을 꿨고 그대로 이루어 가정을 올바르게 이끌어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던 그녀는 바그다드에 사는 막내딸 바버라가 아프다는 소식에 병문안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폭우로 인해 사막 한가운데 발이 묶인다. 투숙객이 그녀뿐인 숙소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기차를 기다리며 생각에 빠진다. 출발하기 전, 바그다드에서 만났던 동창 블란치와의 짧은 대화가 떠오르면서 휴식으로 받아들이던 '자기만의 시간'이 깨지며 혼란에 빠진다. 온전히 '자기'만을 생각하게 되는 시간을 가지게 된 조앤은 생각하면 할수록 떠오르는 석연치 않던 옛날 이야기들과 자신에 대한 의심들에 휩쌓이며 진실들을 끝끝내 부인하려고 하지만 결국 무너지듯이 본래의 '나'와 마주하게 된다. 기다렸다는듯이 자신을 돌아보게 된 조앤에게 영국으로 가는 기차가 오게 되고,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에게 자신을 고백하고자 마음의 준비를 하며 남편에게로 간다.

p.34
조앤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느긋하게 만끽했다. 아주 괜찮은 모험이었다! 단조로운 삶 속에서 크게 환영할 휴식이었다. 기차를 놓친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절대의 고요와 평화 속에서 이십사 시간을 보내는 건 그녀에게 행운이었다. 서둘러 돌아갈 이유도 없었다. 이스탄불에서 가서 로드니에게 도착이 늦어진다고 전보를 치면 그만이니까.

p.105
"내가 그대에게서 떠나 있던 때는 봄이었노라."
다음 구절이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도 같았다. 이 구절로 충분했다. 이 구절이 모든 것을 설명했따. 그렇지 않나? 조앤은 생각했다. 로드니, 로드니.... 내각 그대에게서 떠나 있던 때는 봄이었노라. 그러다가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지금은 봄이 아니야. 11월이지......
그때 갑자기 충격이 밀려왔다. 이건 그가 한 말이잖아. 그날 저녁에......
거기에 상관관계가 있었다. 실마리가, 고요 속에 숨어서 그녀를 기다리는 실마리가 있었다. 그녀는 그것으로부터 달아나고 싶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방천지의 구멍에서 도마뱀들이 나오는데 어떻게 도망치지? 생각이 나도록 내버려두면 안 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p.199
정말 흥미롭다......
자신을 만나다니......
자신을 만나다......
맙소사. 그녀는 두려웠다......
소름끼치도록 두려웠다......

p.200
진실의 조각들이 도마뱀들처럼 튀어나와서 말했다. “나 여기 있어. 넌 나를 알아. 아주 잘 알다마다. 모르는 척하지 마.”
그리고 그녀는 그들을 알았다. 그래서 지긋지긋한 것이었다.

p.242
진실? 그게 진실인지 내가 어떻게 알지? 조앤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모든 것이 자신 쪽에서 한 상상이지 않을까? 구체적인 증거는 하나도 없었다......


1인칭 시점으로 조앤이 진실된 '나'를 만나며 급속도로 무너지면서 자기혐오에 빠지는 과정을 너무나도 날카롭게 표현해낸 솜씨에 감탄했다. 특히 블란치를 동정하며 무시하던 그녀가 중반부에서는 오히려 그녀만이 자신을 좋아해주던 사람임을 깨닫고 찾는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주인공의 감정선이 절로 동화되어 빠져들어가는 데 흡입력 있는 소설이란 이런 것이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이 자기 성찰을 하고서 변화하고자 남편에게 용서를 구하기로 다짐하지만, 그녀가 영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점점 좋지 않은 조짐들을 보이기 시작한다. 집에 도착해 남편을 기다리며 미친 듯이 갈등하는 그녀는 마침내 남편을 돌아보며 한마디를 하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이 마지막 장을 읽기 시작하면서 달라지는 분위기에 소름이 돋으며 속으로 "안돼"를 외쳤다. 나도 모르게 손으로 내용을 가려가며 한 줄 한 줄 읽어내렸고 결국 마지막 문장 때문에 탄식하게 되었다. 완전히 몰입하고 있다가 마지막 그녀의 말에 찬물을 맞은 듯 참담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애거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이 이 마지막에 다 담겨있다고 생각된다. 선선해진 여름 밤, 애거서 크리스티가 필명을 바꾸면서까지 써내려간 이야기에서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읽어보길 권한다.


저자 : 애거서 크리스티
정식 이름은 Agatha Mary Clarissa Miller Christie Mallowan이다. 1890년 9월 15일 영국의 데번에서 부유한 미국인인 아버지 프레드릭 밀러와 영국 귀족이었던 어머니 클라라 보머 사이에서 태어났다.
'메리 웨스트매컷(Mary Westmacott)'이란 필명으로 연애소설을 집필하기도 하였으나 80여편의 추리소설의 '아가사 크리스티'란 필명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집에서 교육받았고, 16살에 파리로 건너가 성악과 피아노를 공부하다가 1914년 크리스티 대령과 결혼했다. 그녀의 소설에 시안화물, 라이신, 탈륨 등의 독약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병원의 약국에서 일했던 경험 때문이다. 전쟁중인 1916년 첫 작품 <스타일즈 저택의 수수께끼>를 썼다.
1928년 남편과의 불화로 이혼한 후 이듬해 고고학자 맥스 맬로원을 만나 1930년 재혼했다. 1967년 영국 추리협회 회장이 되었고, 1971년에는 영국 왕실이 수여하는 DBE 작위를 수여받았다. 1976년 86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90여 권의 책을 펴냈다. 그녀가 창조해 낸 '에르퀼 푸아로', '제인 마플'은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으며, 그녀는 추리소설 장르에서 주목받는 작가로서 추리소설의 여왕이라 불린다.
그녀의 작품은 영어권에서 10억부 이상 팔렸으며 103개의 언어로 번역된 다른 언어판 역시 10억부 이상 판매되어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되었다. 이와 같은 기록은 세익스피어와 견줄만 한 것이다. 또한 그녀의 희곡 <쥐덫>은 1955년 런던에서 초연된 이래 2007년 현재까지 공연 중이다.

옮긴이 : 공경희
전문 번역가로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성균관대학교 번역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했으며, 서울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대학원에서 강의했다. 시드니 셀던 『시간의 모래밭』으로 데뷔한 후 『호밀밭의 파수꾼』,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비밀의 화원』,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파이 이야기』, 『천국에서 만난 다섯사람』, 『우리는 사랑일까』등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우리말로 옮겼다.

글, 사진: 땡스북스 김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