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9일 ~ 8월 15일
땡스북스 금주의 책

소라게 살이
Mediabus
김지은 지음

이 책은 '아티스트 레지던시'에서의 기록을 담은 책이다. 아티스트 레지던시란, 아티스트들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무료(또는 실비)로 작업 공간을 제공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아티스트들이 아티스트 레지던시를 선호하는 더 큰 이유는 큐레이터, 컬렉터, 평론가, 기자 등 미술계 사람들에게 '노출'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이 책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비단 국제 레지던시에서의 경험담 뿐만이 아니라 '소라게 살이'라는 방랑적인 태도의 책 제목과 북 디자인에서 느껴지는 서정적인 느낌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치유로서의 글쓰기

반복되는 일상에서의 답답함과 하고 있는 일에서의 불안감, 좌절감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딘가로 벗어나고 싶은 기분이 들기 마련일 것이다. 이와 비슷한 현실에서 저자는 지난 일년동안 레지던시에서의 경험을 삶에 지친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고 기억하기 위해 글을 써내려갔다.

P.4-5
그래서 지금 이 순간 하려는 것은 일단 쓰겠다는 것이다. 미사여구나 화려한 비유법이나 유명한 사람의 인용구도 없이 작가가 경험한 바를 '직구'로 던질 것이다. 어떤 책이 나올지 기대도 되고 불안하기도 한다. 마치 작업을 시작하기 전, 레지던시에 가기 전 같은 기분이다. 매번 기대보다 걱정이 더 앞서긴 하지만 막상 가보면 무언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무언가가 무엇일지 모르는 것이 불안감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이 세상에 불안하지 않은 삶이 있는가? 불안감과 기대감을 저글링하면서 여행길에 올라보자.

타자로 살아가기

소라게는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자기가 살 집을 이고 살아간다. 저자는 소라게에 비유한 지난 일 여년간의 레지던시 생활의 상당히 매력적으로 들리지만 그리 쉽지 많은 않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하나의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통념이나 관습, 제도가 다른 미국에서, 한국 사회에서 나고 자란 예술가가 작업을 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러한 상황을 인식하고 미국의 소도시에서 이방인으로서 낯선 공간에 마주한 풍경을 새로운 작업의 소재로 만들었다.

P.13
그러나 이곳에서의 생활은 좀 다른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날카로운 주제의식은 당연한 전제이고 그것을 어떻게 풀어가느냐가 또 다른 숙제인 것이다. 특히나 나의 그림이 한국 사람이 아닌 외국 사람들에게 보일 때 이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나는 한국사람 특히 서울 사람에게 무지개떡 방진막과 같은 익숙한 풍경을 제시했다.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은 그 이면에 다른 힘의 작용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었고 이것을 인지하게 될 때 오는 어떤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외국인, 미국인들은 무지개떡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런 무늬의 방진막을 본 일이 없다. 그냥 그저 어떤 풍경일 뿐이다. 내가 아무리 그 내용을 열심히 설명해봐야 알 수 없는 부분인 것이고 내가 원하는 효과를 없을 수도 없다. 여기서 어떤 벽이 생기는 것이다. 점차 나와 공감대가 없는 변화된 관객에 대해 고려하기 시작했고 타자로서 이 땅에서 내가 어떤 이야기들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였다.

P.14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아니라 휙 날아 와서 뚝 떨어진 상황. 하나부터 열까지 하나하나 다 배우고 정착해야 하는 곳. 미국으로 온 이후로 이런 상황은 나에게 버거웠다. 주변환경과의 상호작용을 중요시하는 나로서는 너무나 큰 변화였다.
이곳으로 오기 전엔 막연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지만 어딜 가든 차로 이동해야 하는 서버비아(Suburbia)에서 운전을 못하는 채로 이동의 자유를 잃은 채 살아가는 것, 아무런 기억도 추억도 없고 같이 살아 숨쉬는 것도 아닌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배경과 같은 곳에서 살아가는 것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P.25
미국은 공간을 소비하고 한국은 공간을 재활용한다. 한국에서는 많은 경우에 오래된 건물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 건물을 짓는다. 하지만 디트로이트에서는 택지개발자들이 값이 싼 빈 공간에 집과 쇼핑몰을 짓고 그러는 동안 도심의 역사적인 건물은 흉물이 되어 철거가 된다. 이 경우 도시교외화는 도시의 성장을 의미하지 않고 인구의 이동을 가져와 교외는 확대되지만 도심은 쇠퇴하게 된다. 이곳에서 도시의 개발과 재개발은 딱히 '발전'을 의미하지 않는 것이다.



이 책은 경험담을 담은 에세이 책이기도 하며 예술을 공부하는 누군가에게는 실용적인 필독서가 될 수도 있다. 책을 읽고 있노라면 형광펜을 칠해놓고 싶을 만큼 팁 아닌 팁들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국제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관심이 있지만 인터넷을 뒤적거려봐도 별로 소득이 없었던 이들을 위한 정보와 그곳에서의 저자의 작업 경험들까지 플러스 되어 예술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수확물이 될 것이다.



크랜브룩 아카데미 오브 아트, 버몬트 스튜디오 센터, 킴멜 하딩 넬슨 센터, 젠텔 아티스트 레지던시, 산타페 아트 인스티튜트, 타이베이 예술촌, 난지 미술 창작스튜디오, 스코히건 회화 조각학교. 난지 미술 창작스튜디오의 마지막 날의 기록으로 책을 마무리하다.

P.238
얼핏 보기에 나의 소라게 살이는 이동을 목적으로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아니면 작업을 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는 것처으로 보일 수도 있고, 소위 말하는 스펙을 쌓기 위해 가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바라보는 '소라게 살이'는 '이동'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 아니라 '거주'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노마드'라는 표현을 거부하고 '소라게 살이'라는 말을 만들게 된 것이다. 시작하기 전부터 언제가 끝인지가 명확히 보이는 상황에서 나는 누구보다 어떻게 하면 이곳에서 잘 '거주'할 수 있는가를 치열하게 고민해 왔다. 제대로 거주하기 위해 그 장소에서만 할 수 있는 것들을 찾고자 했고 작업을 매개로 그곳의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원했다.
레지던시는 일상이 아니다. 일상의 연속성이 없고 그 기간이 끝나면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들에게 레지던시는 일종의 안락한 '버블'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그 기간만큼은 세상의 풍파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고 작업에만 열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큐베이터 안의 아기처럼 세상으로 나오기 전까지 나 또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소라껍질 삼아 나를 보호하고 그 안에서 나를 성장시켰다.

저자: 김지은
서울대학교 서양화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외곽에 있는 Cranbrook Academy of Art에서 페인팅을 전공했다. 미국, 대만, 한국에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가하였고, 인사미술공간(‘제도화된 풍경 2005), 브레인 팩토리(‘계획된 진부화’ 2010), 대안공간 루프(‘소라게 살이’ 2011)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회화와 설치를 중심으로 현재 전업작가로 활동 중이다.

글, 사진 : 땡스북스 최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