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10일 ~ 2017년 3월 16일
땡스북스 금주의 책

모터사이클로 유라시아
미메시스
손현 지음

짧은 국내 여행을 가더라도 준비가 필요한데 반년이 넘게 해외를, 그것도 한 곳이 아닌 여러나라를 돌아서 오는 여행이라면 얼마나 많은 준비가 필요할까. 짐을 많이 실을 수 있는 차도 아니고 모터사이클로 러시아에서 유럽을 지나 일본까지 돌아서 온 여행기가 담긴 이 책을 읽어보기도 전에 루트만 보고 가져갈 짐에 대한 걱정부터 한다. 내가 짊어질 삶의 무게를 걱정하느라 살아보기도 전에 지쳐버리는 것처럼.

여행기를 진득하니 읽기보다 정보페이지만 보거나 편한 방법만 찾게 된다. 그렇게 떠난 여행은 안전하게 현재의 삶으로 돌아올 수 있지만, 돌아오는 순간 여행은 추억이 될 뿐 현실과 동떨어진 삶이 되버린다. 떠나기 전과 다를 바 없다.

이 책은 다행히 여행 정보는 실려있지 않았다. 정보를 요약해서 담거나 편한 루트를 그려넣은 지도를 주지도 않는다. 아마 그런 요소가 있었다면 이 책의 가치를 발견하기도 전에 책장 어딘가 이중으로 꽂혀진 여행서 중 하나가 됐을 것이다. ‘소멸에 대한 불안’으로 남겨둔 글들은 저자의 표현처럼 ‘여행 기간만큼 더 걸려서’ 책으로 묶였다. 덕분에 모터사이클 뒷자리에 앉아서 여행을 다녀온 듯 책을 덮은 후의 현실이 낯설다.

p.11
두려움에는 크게 다섯 가지 요소가 있다고 한다. 소멸, 절단, 자유의 상실, 분리, 자아의 죽음이다. 그중 소멸은 두려움의 가장 원초적 기반이다. 나 또한 소멸에 대한 불안을 갖는다. 불안하기 때문에 나는 기록한다. 이글은 <모터사이클>보다는 <불안>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체력과 운이 되는 한 반짝하고 찬란하게 빛날 이 모터사이클 여행을 기록함으로써 불안을 받아들이려 한다. 물론 이것이 내 욕심이고, 그 욕심조차 언젠가 사라질 것을 알고 있지만.

p.98
“저는 사람들에게 일과 사생활의 <균형>이 아닌 <통합>을 권유합니다. <균형>은 일과 사적인 삶이 서로 적대적이며 공통점이 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일과 사생활은 대부분 사람과 관련돼 있습니다. 양쪽 영역 모두에 스트레스가 존재하죠. 또 일정을 맞추고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일과 사생활을 별개의 것으로 여기게 되면 한 영역에서 거둔 성공을 다른 영역으로 가져갈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마음 챙김을 실천하면 이러한 구분은 누군가 임의대로 지어 버린 것을 뿐이며 이로 인한 제약을 받을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되지요.(앨런 랭어, 앨리슨 비어드, 복잡한 시대에 주목할 만한 마음 챙김의 미학, HBR, 2014.3)”
내가 평소에 추구해 온 미덕은 주로 균형에 대한 것이었다. 회사원일 때는 일과 삶의 균형이 가능한지 많은 고민을 했고, 여러 시행착오를 통해 결국 그것이 허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비소 디디바이크에서의 경험은 비로 짧은 시간 동안의 얕은 관찰이지만 다른 가능성을 보여줬다. 가장 놀라운 점은 이들에겐 일과 삶의 구분이 딱히 없다는 것이다. 균형을 따질 필요조차 없었다. 일과 삶은 단순히 퇴근 시점을 기해 독립적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p.140
작년 봄, 두명의 헤드헌터와 접촉했다. 당장 회사를 옮기려는 생각보다는 커리어 패스에 대해 전반적으로 진단을 받고 다른 산업군 또는 직무에 대해 정보를 얻고 싶었다. 그리고 그 방향을 정하면 차근차근 준비할 계획이었다. 난 그들에게 조심스레 2015년에 노르웨이까지 모터사이클 여행을 다녀올 거라고 말했다. -중략- 문득 둘의 상반된 조언이 떠올랐다. 가지 말라는 A대신 나는 다녀오라는 B의 조언을 취했지만, 이미 답은 내 안에 있었다. 단지 나보다 사회 경험이 많은 이에게 동의를 구하고 싶었던 것 같다. 어쨌든 길 위로 나섰고 두달이 지났다. 상상한 것 이상으로 다채로운 경험을 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계를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자연에 대한 경이>는 일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p.178
그는 노르웨이 북서부 해안가에 있는 로포텐 제도를 추천하며, 자신이 살면서 다녀온 길 중 가장 아름다웠다고 덧붙였다. 이제 어디로 가냐고 물었더니 핀란드를 거쳐 내려갈 거라며 그쪽 길은 볼거리가 없어 따분하단다. 난 그동안 달려온 경로를 이야기하며 나처럼 울퉁불퉁한 시베리아 도로를 지나 핀란드에 진입하면 다르게 느껴질 거라며 웃었다. 다분한 건 모르겠고 마치 양탄자 위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쾌적했으니까. 무엇이든 상대적이다.

여행을 통해 성찰을 이룬 사람은 사실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언젠가는 삶에서 찾아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시속 120km로 내달리며 온몸으로 바람을 견디고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뼈마디에 스며든 성찰은 웬만한 삶의 풍파에서도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소형2종 면허도 아니 원동기 면허도 없는 나로서는 그런 경험이 부럽기만 하다. 대리만족으로 느낀 것은 또 언젠가 휘발되고 말 것이다. 나도 나 자신을 한계에 몰아부칠 수 있을까.

p.327
자의든 타의든 여전히 많은 사람이 이동한다. 전쟁, 테러, 재난 뿐 아니라 자유로 포장된 자본이 우리를 움직이고 있기도 하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우리에게 두가지 옵션이 있다. 이동 속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죽을 것인가. 살아남는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모터사이클에서 그 힌트를 얻고 싶다. 모터사이클에 비유하자면 살아남는 것은 곧 넘어지지 않는 것이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관성력, 자이로스코프 그리고 셀프 스티어링 이렇게 세 가지 운행원리가 필요하다고 배웠다. 모터사이클에는 회전하는 팽이 같은 자이로스코프란 장치가 있다. 회전하는 동안 넘어지지 않는 팽이처럼, 몸의 일부가 도로에 닿을 정도로 차체를 기울여도 1분에 수천 번 회전하는 엔진 덕분에 바이크는 넘어지지 않고 관성력에 의해 계속 이동한다. 또한 셀프 스티어링을 통해 뒷바퀴 방향에 맞춰 앞바퀴가 자연스럽게 방향을 잡아 균형을 유지한다.
이처럼 넘어지지 않고 달리려면 계속 회전해야 한다. 멈추면 곧 동력을 잃고 넘어진다. 그 속도가 느리든 빠르든 상관없다. 느린 대신 무게 중심을 잘 잡으면 된다. 무게 중심이 있다는 전제가 성립해야 관성이 생기고 자동으로 방향을 잡기 때문이다.

p.486
길에서 만난 라이더들이 나에게 꼭 묻는 것이 있다. 네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얼마나 빠르게 가는지, 마지막으로 내비게이션이 있는지. 장소와 상황에 따라 대답은 조금씩 달랐다. 문득 질문의 내용이 곧 나에 대한 중요한 물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꿔 말하자면 과거의 내가 누구인지, 당장 또는 장기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그것을 나만의 속도로 이룰 수 있는지, 마지막으로 방향을 잘 잡을 수 있는지를 물었던 것이다.

모터사이클이 아니어도 나를 움직이게 하는 일은 많이 있다. 흔들리거나 휩쓸리지 말고 나아갈 목표와 무게가 필요하다.
책 덕분에 한참 긴 여행을 다녀온 듯 하다. 다시 현실에서 살아 가겠지만 얕은 성찰이 휘발될 때마다 이 책을 다시 펼쳐야겠다.

저자: 손현
198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은행원인 아버지를 따라 1987년부터 1991년까지 파나마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고 졸업 후 플랜트 엔지니어로 회사 생활을 했다. 2012년 매거진 [소년의 시간은 똑바로 간다]를 발행했고, 그 계기로 매거진 [B] 에 객원 에디터로 참여했다. 이듬해 2종 소형 면허를 따고, 2015년 회사를 떠나 여행을 다녀왔다. 현재 미디어 콘텐츠 스타트업에서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다.

글, 사진: 땡스북스 김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