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4일 ~ 3월 10일
땡스북스 금주의 책

금수
바다출판사
미야모토 테루 저, 송태욱 역

한 달에 한 번 친구와 같은 책을 읽고 엽서를 주고받는 시간을 갖고 있다. 아무런 목적 없이 서로의 근황을 전하고 순간의 고민을 나누는 그 시간이 즐겁다.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이지만 여유를 가지고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내려가는 순간만큼은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 진심을 전달하기엔 편지만한 게 없다는 친구의 말처럼 천천히 편지를 쓰다 보면 온전한 마음이 드러날 때가 있다. 차마 낯간지러워 못 했던 말도, 용기가 없어 전하지 못 했던 말도 편지지 앞에서만큼은 가능하다. 그래서인지 누군가의 마음속 얘기를 가만히 듣고 싶어지는 날이면 편지를 꺼내 읽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열네 통의 편지로 이루어진 <금수>는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소설이었다.



P.19
장문의 편지가 될 것 같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재미있지도 않은 이 편지를 읽다 말고 찢어서 버려 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저는 마지막까지 쓸 생각입니다. 사실은 당신과 헤어질 때, 그러니까 10년 전에 이야기했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야기는 그녀가 그에게 쓰는 편지로 시작된다. 오래전 둘은 긴 연애 끝에 결혼을 했고 첫아이를 계획하고 있는 행복한 부부였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그녀는 그가 불륜 대상과 호텔에서 동반 자살 시도를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살아났고 그 뒤로 그와 그녀는 깊은 대화 한 번 제대로 나눠보지 못하고 이혼했다. 그러다 헤어진 지 십여 년 만에 지방의 한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겨우 가라앉았던 사랑, 슬픔, 증오, 미련, 후회 그 모든 복잡 미묘한 마음이 다시 떠올랐고 결국 그녀는 뿌예진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예전 일에 대한 해명을 바라는 편지를 전하게 된다.



P.45
편지를 다 읽었을 때는 답장을 쓸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날이 지남에 따라 저 역시 이야기하지 못했던 많은 심리적 사건을 가슴속에 담아두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주저하면서 펜을 들었습니다. 당신은 어쩐지 애매한, 거기에 확실한 의지가 없었던 우리의 이별이라고 썼습니다만, 그건 잘못 안 것입니다. 제 쪽에 헤어지지 않으면 안될 명백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의 답장은 그녀가 바라던 대로 과거로 되돌아간다. 그의 기억은 그녀와 조금 달랐다. 같은 이별을 겪었다고 해도 각자의 시선에 따라 다르게 기억될 수밖에 없다. 얼어버렸던 그들의 오해는 편지 한 통이 오고 갈 때마다 조금씩 녹는다. 그렇게 흐트러졌던 두 사람의 퍼즐이 완성되어 간다.

<금수>를 번역한 송태욱씨는 후기에서 이렇게 소개했다. “이 소설은 환상을 잃어가고 그 자리에 현실이 들어오는 과정을 담았다. 모든 걸 제자리로 돌리려는 안간힘을 담은 이 편지들은 달뜬 연애편지보다 차분해서 서글프고 애달프다. 사랑을 얻기 위한 편지가 아니라 추억의 자리로 돌리기 위한 안간힘의 표현이라 더욱 그럴 것이다.”



P.254
오른쪽으로 갈까, 왼쪽으로 갈까, 꼭 인생이구나, 하며 묘하게 감탄하면서 저는 매일 걸었습니다.

P.262
아마 이 편지는 제가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되겠지요. 저는 이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면 미용실 간판을 찾아 다음 목표 지역인 네야가와 시의 모든 길을 터벅터벅 계속 걸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지', '이 일이 나에게 의미가 있는가',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등 내게 일어나는 일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야무지게 정의 내리고 싶지만 그게 마음대로 안 된다. 설령 나만의 기준으로 그 의미를 찾았다 해도 시간이 지나 되돌아보면 성급했던 마음이 부끄럽기만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인생의 의미는 인생이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인생에 대답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고민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내게 주어진 질문에 답하며 계속 걸어나가는 것이다. 혹시 마음이 대답을 주저하면 그땐 기다릴 필요가 있다. 환상이 빠져나가고 현실이 들어올 때까지.


P.276
이 편지를 쓰면서 저는 당신에게서 받은 모든 편지를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것들이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어느 것이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저만의 마음의 무늬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딱 하나 글로 전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자신의 목숨이라는 것을 본 당신은 그것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무서워졌다고 썼지요. 하지만 사실은 짧다고 하면 짧다고 할 수 있고 또 길다고 하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이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가장 강력한 양식이 되는 것을 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뒤늦은 미련과 남은 후회 모두 편지로 털어냈다. 모든 게 제자리를 찾은 듯했다. 그런데 그녀는 마지막 편지에 여전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무늬'가 남았다고 썼다. 나 역시 둘의 편지를 다 읽고 나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마음이 남았다. 사랑은 언제나 알 것 같다가도 모르겠다. 미야모토 테루는 그 점을 섬세하게 또 아름답게 드러내면서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을 편지로 수놓았다. 책의 제목이 그제야 와 닿았다. 금수(錦繡)는 금으로 수를 놓다라는 뜻이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황동규, 즐거운 편지 중에서

책을 덮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우연히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를 만났다. 이 시가 책을 다시 읽어주는 것 같았다. 밤이 든 골짜기엔 눈이 퍼붓고, 영원할 것 같던 사랑이 그칠 것을 알지만 그때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끝을 알 순 없지만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는 동안 그들의 삶에는 아름다운 수가 놓일 것임을 믿는다.




저자: 미야모토 테루
20세기 후반 일본 순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비를 피하려고 잠시 들른 서점에서 읽은 유명작가의 단편소설이 너무나 재미있어서 카피라이터를 그만두고 전업작가의 길을 걷게 됐다. 1947년 일본 고베에서 태어났다. 오테몬학원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산케이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근무하다가 1975년 신경불안증으로 퇴직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1977년 『진흙탕 강』으로 다자이오사무상을 받으며 데뷔했고, 이듬해 1978년 『반딧불 강』으로 아쿠타가와상을 받으면서 작가로서의 지위를 다졌다. 폐결핵으로 일 년 가까이 요양한 뒤 곧 다시 왕성한 집필활동을 계속한다. 1987년에는 『준마』를 발표하면서 역대 최연소인 40세로 요시카와에이지 문학상을 받았고, 같은 작품으로 JRA상 마사문화상을 받았다. 이후 아쿠타가와상, 미시마유키오상 심사위원을 비롯하여 각종 문예지의 신인상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대표작으로는 ‘강 3부작’으로 불리는 「흙탕물 강」, 「반딧불 강」, 『도톤보리 강』, 서간체 문학인 『금수』, 자전적 대하 작품 연작으로 영화화되거나 라디오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한 『유전의 바다』(1984), 『도나우의 여행자』(1985) 등이 있으며 『사랑은 혜성처럼』, 『해안열차』, 『인간의 행복』, 『이별의 시작』, 『피서지의 고양이』, 『반딧불 강』, 『우리가 좋아했던 것』『파랑이 진다』『환상의 빛』 등의 작품이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역자: 송태욱
연세대학교 국문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외국어대학교 연구원을 지냈으며, 현재 연세대학교에서 강의하며 번역 일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르네상스인 김승옥』(공저)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사랑의 갈증』, 『비틀거리는 여인』, 『세설』, 『만년』, 『환상의 빛』, 『탐구 1』, 『형태의 탄생』, 『눈의 황홀』, 『윤리 21』, 『포스트콜로니얼』, 『트랜스크리틱』, 『천천히 읽기를 권함』, 『번역과 번역가들』, 『연애의 불가능성에 대하여』, 『소리의 자본주의』, 『베델의 집 사람들』, 『매혹의 인문학 사전』, 『책으로 찾아가는 유토피아』, 『핀란드 공부법』, 『빈곤론』, 『유럽 근대문학의 태동』, 『세계지도의 탄생』, 『십자군 이야기』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호모 이그니스, 불을 찾아서』,『바이바이, 엔젤』,『관능미술사』등이 있다.

글, 사진 땡스북스 이금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