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6일 ~ 5월 12일
땡스북스 금주의 책

진달래꽃
혜원출판사
김소월 지음

문득문득 마주치는 시 한 구절이 그 날 하루의 내용을 바꿀 정도로 와 닿았던 적은 있는데, 막상 작정하고 앉아 시를 읽기가 어려웠던 경험이 있다면, 시집 하나 사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매해 봄 나는 괜시리 헛헛한 마음에 시집을 한 권씩 사 모았다. 시를 읽는다는 것보다 시집을 산다는 점이 내게는 더 중요했다. 봄을 맞이하는 의식같은 일이라고나 할까. 해를 거듭할수록 책장에 늘어가는 내지가 빳빳한 시집들을 보면 괜한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서점 매대 위에 놓인 예쁜 표지의 책을 보면 어쩔 수 없이(?) 사야만 했다. 올해 2월 혜원출판사에서 출간한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또한 나의 ’읽지는 않는 시집 컬럭션’에 추가되기에 여러모로 적합한 책이었다. 다만 올해의 봄은 꽃구경하기에도 바빴고 감정이 메말라서인지는 몰라도 시집을 사는 의식은 잠시 잊혀졌다. 그런데 며칠 전,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이 시집, 진달래 꽃의 표지를 보고는 이번에는 정말로 작정하고 시를 읽어보자고 마음먹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학창시절부터 많이 봐왔던 시라서일까, 시의 전문을 보면 깊은 생각없이 으레 쭉 훑어보기만 하곤 했다. 학창시절의 ‘시’란 해석해야 하는 것이었다. 한 문장 한 문장에 밑줄을 긋고, 작가가 처한 상황과 그 시대, 그의 인간관계까지도 파악해야 모름지기 시를 잘 아는 것. 제일 중요한 것은 ‘시를 풀이하는 것’이지, 아름다운 시 한 편이 주는 사념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시와 친해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시 읽기에는 마음의 여유와 천천히 음미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배우고 있다.



이 예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영국의 한 음악평론가가 밴드 Oasis의 음악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큰 축복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었다. 당시 Oasis는 노동자 계급으로써 잘나가던 중산층 밴드인 Blur와 대립구도였고, 대중과 서민을 대변하는 가사로 큰 지지를 받았었다.
주로 민중적이면서 서정적인 작품을 많이 쓴 김소월의 시에는 사랑할 때 느끼는 애절함과 불안함, 한의 감정들을 읽을 수 있다. 위 평론가가 말한 것과 비슷하게, 누군가를 깊게 사랑한 적이 없다면 김소월의 시는 따분하기 그지 없을 것이다. 나 또한 Oasis와 김소월의 시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Blur의 음악도 좋아하지만.



시를 천천히 읽다보니 어떤 구절에 눈길이 더 오래 머물고, 마음이 쿵 내려앉을 때가 있었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전히 막연한 멀지 않은 미래, 지나간 사람에 대한 기억과 같은 여러 상념들. 그렇게 시를 읽고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집중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눈길이 오래 머문 한 줄의 시는, 문장을 넘어서서 나와 마주하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시집 한 권으로 짧지만 깊은 경험을 할 수 있으니 봄이 가기 전에 아름다운 시 한 문장 읽어보는 게 어떨까.





저자: 김소월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의 시인. 1902년에 태어났으며 본명은 정식으로 평북 구성 출생이다.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오산학교에서 조만식과 평생 문학의 스승이 될 김억을 만났다. 오산학교 교사였던 김억의 지도와 영향 아래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920년에 「그리워」등을 창조지에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1922년에「금잔디」「엄마야 누나야」등을 개벽지에 발표하였으며, 이어 같은 잡지 1922년 7월호에 떠나는 님을 진달래로 축복하는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을 발표하여 크게 각광받았다.
3·1 운동 이후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배재고보 5학년에 편입해서 졸업했다. 1923년에는 도쿄상업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9월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중퇴하고 귀국했다. 이 무렵 서울 청담동에서 나도향과 만나 친구가 되었고 「영대」동인으로 활동했다. 이후 김소월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도왔으나 일이 실패하자 처가인 구성군으로 이사하였다. 구성군 남시에서 개설한 동아일보 지국마저 실패하는 바람에 극도의 빈곤에 시달렸다. 본래 예민했던 그는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고 술로 세월을 보냈으며, 1934년 12월 24일 곽산에서 아편을 먹고 음독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1981년 금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으며 서울 남산에 그를 기리는 시비가 있다.
김소월은 불과 5, 6년 남짓한 짧은 문단생활 동안 그는 154 편의 시와 시론을 남겼다. 초기에는 민요조의 여성적이고 서정적인 목소리의 시작활동을 하였으나 후기작(「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등)에서는 민족적 현실의 각성을 통해 남성적이며 참여적인 목소리로 기울었다. 전래의 정한의 세계를 새로운 리듬으로 표현한 김소월의 시는 향토적인 체취가 강하게 풍기고 있으며 우리 민족의 문학적 생리에 배겨 있는 민중적·민요적 리듬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글, 사진: 땡스북스 최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