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1일 ~ 1월 7일
땡스북스 금주의 책

지지 않는다는 말
마음의숲
김연수 저

해가 바뀌고 나이를 먹었다. 단지 어제에서 오늘로 넘어온 것뿐인데 마치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짠! 하고 변신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모두가 같은 마음인 듯 서점은 자기계발서나 학습서를 사러 온 이들로 붐비고, 각종 어학원과 피트니스 센터 역시 1년 치의 각오를 팽팽히 다지고 온 이들의 눈빛으로 열기를 띤다. 이는 아마도 해가 바뀌고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그저 숫자의 변화뿐만이 아닌 그것에 정비례하는 모습으로 세팅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 아닌 의무감 때문일 것이다. "네 나이가 몇인데 아직 ~ 하니?"나 "OO씨도 이제 사회생활이 n년차인데 ~ 해서 되겠습니까?" 같은 사회의 요구와 시선에 주눅들지 않기 위해 누군가는 새해가 시작되는 설렘을 불안과 조급함으로 맞바꾼다. 그렇게 우리는 연초부터 애쓰기 시작한다.

나 역시 그렇다. 실수해도, 실패해도 괜찮다며 너그러이 이해받긴 어려운 30대, 그리고 직장생활 6년 차가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회의 요구가 아닌 스스로를 무참히 뚫어보는 나의 시선이다. 나 자신을 향한 평가는 타인의 그것보다도 훨씬 잔인하고 날카롭다. 당장 내가 나를 인정하지 못하니 외부의 상황에서도 '너는 짖어라. 나는 내 갈 길 간다.' 하며 패기롭게 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로 인해 내 삶을 소리 없이 지탱해오던 대책 없는 긍정과 자신감은 점점 희미해졌고, 그것을 극복해보고자 용쓰는 일도 금세 힘을 잃어갔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내가 나를 믿어주지 않으면 나는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무기력, 그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기분은 내 인생이 나아지는 일에 어떤 보탬도 되지 않았다. 벗어나고 싶었다. 스스로 변화를 꾀하는 게 힘들 경우엔 주변 환경의 변화로 자연스럽게 기분 전환을 하는 방법도 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2016년이 됨과 동시에 내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는 나름의 변화를 맞이했다. 이것은 내게 기회였다. 0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 물론 어학원 수강증이나 피트니스 센터의 회원권을 끊진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나이에 비례하여 깨달은 유일한 삶의 지혜인데, 매년 세 달 치의 비용(할부)을 내며 해당 단체에 기부해온 나를 냉정히 받아들임으로써 얻은 것이다.) 1월 첫째 주의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한 자기계발서나 심리서도 사지 않았다. 대신 책장에 꽂혀있던 김연수의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라는 위로가 아닌 "야, 괜찮아. 까짓것 잘 안 되면 어떠냐?"라는 왠지 모를 뻔뻔함이 생기게 하는 그의 에세이를.


P.9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지지 않는다는 말이 반드시 이긴다는 걸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지지 않는다는 건 결승점까지 가면 내게 환호를 보낼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는 뜻이다. 아무도 이기지 않았건만,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그 깨달음이 내 인생을 바꿨다.

P.23
얼마 전에 나는 타이완에 다녀왔다. 그 여행의 교훈은 제정신이라면 여름에는 타이완을, 그것도 타이페이를 갈 생각을 하지 말아야만 한다는 점이었다. 옷을 갖춰 입고 찜질방 불가마 속을 하루 종일 걸어 다니면 대충 8월의 타이완 여행과 비슷하리라. 그럼에도 나는 그 찌는 듯한 더위를 웃으면서 견딜 수 있었다. 왜냐하며 타이페이 타오위안 국제공항에 내렸을 때, 나는 그 여행이 나흘 뒤면 끝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죽기 전에 내가 다시 타이페이를 방문할 수 있을까? 여행지에서는 그런 질문을 자주 던지기 때문에 영혼이 깨어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마 평상시에도 그런 질문을 반복적으로 던진다면, 누구의 영혼이라도 깨어나리라. (중략) 내가 타이페이를 다시 방문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만 할까? 더위보다는 경험에 집중하게 되겠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고통이 아니라 지금 소설을 쓰는 일이다. 그리고 고통이 아니라 지금 소설을 쓰는 일에 몰입한다면 결국에는 소설을 완성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P.15
지금 여기에서 가장 좋은 것을 좋아하자.
하지만 곧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나올 텐데.
그때는 그 더 좋은 것을 좋아하자.
그게 최고의 인생을 사는 법이다.

P.145
어른들이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일 위주로 생활하면 인생에서 후회할 일은 별로 없다. 늙을수록 시간은 점점 줄어들기 때문에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가능한 한 빨리 해야만 한다.


지금껏 내가 읽었던 대부분의 자기계발서는 '-하라',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해가 바뀌고 달이 바뀌어도 나는 그대로의 나인데 자꾸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변화를 강요한다. 물론 그로 인해 나도 다른 사람이 되고자 '성공'이란 붉은 띠를 머리에 동여매고 열의를 불태워보지만 그런 자극은 늘 오래가지 못했다. 하지만 <지지 않는다는 말>에선 '-해라' 라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하고 싶어진다. 굳이 책 속에 성공한 저자처럼 되지 않아도, 내 출신과 학벌, 직장을 세탁하지 않아도, 그저 지금 이대로의 나로도 내 삶이 더 좋아질 수 있다는 정체 모를 기대감에 가슴이 뛰었다. 그렇게 이 책은 나를 몰아세우고 다그치는 자극 대신 내 마음속에 잔잔한 동요를 일으켰다.


물론 아직까진 김연수처럼 매일 '달리는 일'에는 자신이 없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알려준 대로 매일 '후달리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 자기 의지대로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달리기의 반을 이룬 셈이라는 그 말을 기억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2016년, 매일 후달리지 않는 하루를 살기 위해 천천히 달려볼 것이다.


"달리기는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시작할 때 그렇지 않다면, 끝날 때는 반드시 그렇다."


저자 : 김연수
전통적 소설 문법의 자장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소설적 상상력을 실험하고 허구와 진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 김연수. 197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영문학과를 졸업.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고 이듬해 장편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나섰다.

대표작에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7번 국도』 『꾿빠이, 이상』 『사랑이라니, 선영아』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소설집 『스무 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 『여행할 권리』,『청춘의 문장들+』 등이 있다. 역서로는 『대성당』(레이먼드 카버), 『기다림』(하 진), 『젠틀 매드니스』(니콜라스 바스베인스), 『달리기와 존재하디』(조지 쉬언) 등이 있다.

2001년 『꾿빠이, 이상』으로 제14회 동서문학상을, 2003년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로 제34회 동인문학상을, 2005년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로 제13회 대산문학상을, 그리고 2007년에 단편 「달로 간 코미디언」으로 제7회 황순원문학상을, 2009년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1990년대 초반에 등단하여 그보다 더 오래고 튼실한 문학적 내공으로 오로지 글쓰기로만 승부해온 김연수의 그간 행보는 동세대 작가들 가운데 가장 뚜렷하고 화려했다. 6권의 장편소설과 4권의 소설집에 한국을 대표하는 크고 작은 문학상들의 잇단 수상. 새로운 작품이 소개될 때마다 열혈 팬심은 물론이요, 문단 안팎의 신망은 그만큼 두터워진 게 사실이다. 어느 시인의 단언처럼 ‘21세기 한국문학의 블루칩’ 소설가로서 이미 일가를 이룬 작가 김연수다.

글, 사진: 땡스북스 최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