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02월 10일 ~ 02월 16일
땡스북스 금주의 책

나의 핀란드 여행
은행나무
가타기리 하이리 저/권남희 역


나는 여행 에세이를, 그 중에서도 다른 나라를 배경으로 한 글을 편애한다. 그런 글을 읽을 때면 갈 만한 데라곤 대형마트뿐인 동네에서 이국의 공기를 마시는 기분이 든다. 매여 있는 몸에 대한 보상으로 종종 그것들을 사식처럼 넣어줘야 한다. 쓰인 지 한참 지나도 상관없다. 최신정보보다 여행자가 묻혀 온 낯선 냄새로 가득한 글이 좋다. 현실적이고 현장감 넘치는 서술이 중요하다.
땡스북스의 여행 서가에서 어쩐지 추울 것만 같은 유럽 국가는 왼쪽 밑에서 세 번째 칸에 모여 있다. 맑은 눈, 차갑고 깊은 호수, 조용한 밤이 생각나는 책등을 나는 오래 눈여겨 보았다. <나의 핀란드 여행>. 바로 손을 대지 못한 건 ‘카모메 식당 뒷이야기’ 라는 표지 문구 때문이었다. 책은 일본 배우 가타기리 하이리가 영화 촬영을 위해 핀란드에 머무른 한 달을 담고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책을 펼쳐야겠다, 그렇게 지레 단념해 버렸다.


최근 배우 박정민의 에세이를 읽으며 바보처럼 실실 웃었다. 기교도 없고 자연히 허세도 없는 문장은 투박한 맛이 났다. 적당한 때 치고 들어오는 드립은 또 어떻고. 이 사람이 쓰는 글의 맥에는 개그본능이 흐른다고 생각했다. 멋 없는 문장을 이어가며 언제든 빵 터트릴 틈을 보고 있었을까. 그의 글을 읽은 뒤, 티비에 나오는 사람이 쓴 책에 근거 없는 의심을 품었던 지난 날을 반성했다. (이 글은 가타기리 하이리의 책을 소개하려는 목적으로 쓰였습니다. 저는 박정민 님의 팬카페에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박정민 파워로 가타기리 하이리와의 만남은 수월해 졌다. 둘은 배우라는 공통점에서 시작해, 멋 대신 솔직함과 소소한 개그로 읽는 사람을 무너뜨리는 능력이 똑같았다. 괜히 얼굴도 닮은 것 같다. <카모메 식당>을 미리 보지 않았다는 약점도 더는 의미가 없었다. <나의 핀란드 여행>은 영화의 부록이 아니라 독립된 세계임을 그때 알았다.


p.125-126
낮게 내려앉은 하늘에는 핀란드어 전통 가요가 잘 어울렸다. 분명히 그런 토양에서 태어난 음악일 것이다. 가장 빛나는 계절밖에 모르는 내게는 해가 뜨지 않는 겨울 같은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핀란드의 겨울에서 고통스러운 것은 혹독한 추위보다 오히려 그 어둠이라고 한다. 나는 또 하나, 핀란드의 혼을 접한 기분이 들어 이번에야말로 이렇게 확신했다.
역시 비도 나쁘지 않다.


내게 핀란드는 자일리톨과 사우나, 무민의 나라. 핀란드에 살다 온 친구에게 핀란드어 인사와 귀여운 욕설을 배웠는데,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내 평생 핀란드에 가볼 일이 있을까 싶다. 핀란드 핀란드 핀란드. 뚫어져라 보고 있자니 더 생소해 지는 땅이다. 저자에게도 그랬다. 가타기리 하이리는 ‘북유럽은 연어?’ 라는 애매한 공식만을 가지고 비행기에 올랐다.
그런 배경지식만으로도 핀란드에서의 시간을 정신없이 보낼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궁금해’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대단한 호기심 대장은 핀란드를 제대로 씹어 먹었다. 시장, 클럽, 극장, 출장 마사지, 가라오케 바, 시골 농장까지 구석구석.


p.49
그리고 링곤베리. 월귤을 말하는 건가. 그 소스는 노골적인 신맛이 야생의 냄새에 아주 잘 어울렸다. 핀란드 숲을 통째로 먹고 있는 것 같다.


궁금해 할 것. 새로운 나라와 문화와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그것에서 시작하나 보다. 말도 안 통하고 정서도 다르고 모든 게 낯설지만, 사소한 호기심을 내버려두지 않고 해소하기 위해 부딪히면 결과는 장담할 수 없어도 앞으로 나갈 순 있다. 가타기리 하이리의 여행에서 이처럼 흡수하고 싶은 기본이 많았다.


p.53-55
한밤중의 일본에서 메일이 와 있다. 나는 언제나 의기양양하게 답장을 썼다.
도쿄는 지옥의 열대야입니까? 이곳은 투명한 바람이 부는 백야의 해 질 녘입니다. 지금은 저녁 6시입니다만, 바깥에는 아이들 노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직 해가 지려면 멀어서 나도 지금부터 놀러 나갑니다.

책은 단순히 핀란드에서 겪은 일들의 모음이 아니다. 저자는 중간중간 여러 나라를 경험하며 쌓은 사건과 생각들을 곁들인다. 덕분에 이야기가 다채롭고 풍성하다. 독자는 핀란드에 머물다가 베트남, 캄보디아, 멀게는 과테말라에 떨어질 수도 있다. 여행은 ‘소중한 한때’ 를 남긴다. 아침 해니 석양이니, 일상에서 지나치는 모든 시간들이 여행지에선 빛나는 순간이 된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만 유효한 환상도 아니다. 헬싱키의 석양에서 캄보디아의 아침 해를 떠올리는 것처럼 ‘소중한 한때’ 는 계속 이어진다.


저자가 핀란드 여행에서 돌아온 뒤의 생활을 책 끝에 써 넣은 것도 재밌다. 귀국 후 얼마간은 멍한 상태가 된다. 어리석은 꿈을 꾼 것 같고, 순순히 현실에 적응하자니 조금 억울하다. 그때는 두고 온 나라와 문화와 사람의 기억을 불러낸다. ‘소중한 한때’ 는 한 번 마음속에 자리 잡으면 떠나는 법이 없으니까.


p.195
그런 새끼 양들의 초원에서 호통 소리가 난무하는 늑대의 무리에게로 돌아왔다.
그래서 마음이 불편한가 하면 실은 그렇지도 않다. 그 안에 있을 때는 깨닫지 못했지만, 새삼 보면 재미있는 일뿐이었다. 외국인의 눈이 되어 주위를 보게 된다. 그러자 여러 가지 일이 새롭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힘들었던 일도 웃으며 보게 된다.
(중략)
새끼 양들을 관찰하듯이 늑대의 생태도 관찰했더니 유쾌한 일을 많이 발견했다.


봄이 되면 삿포로에 간다. 혼자 해외여행은 처음이다. 그곳에서 나는 어떤 의문을 가질지, 무엇을 맛 보고 누구의 도움을 받을지, 얼마나 많은 편견을 씻어내고 올지. 기대되고 걱정되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일단 책에서 얻은 여행자의 낭만적인 습관을 잊지 않기로 한다. 낯선 지역에 떨어져 어디로 갈지 난감하다면 서점에 들어가겠다. 혹시 모르지.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 가타기리 하이리가 연기한 미도리처럼 한국어로 된 포켓몬 도감을 읽고 있으면 누군가 말 걸어 줄지도.





저자 : 가타기리 하이리
1963년 도쿄 출생. 세이케이대학교 일본문학과 졸업. 극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극단에 입단해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오랜 극단 생활을 통해 쌓은 실력을 바탕으로 연극, 드라마, 영화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는 일본의 대표적인 개성파 배우다. 대표 출연작으로는 영화 <카모메 식당>, 드라마 <수박> 등이 있다. 첫 에세이집인 《나의 핀란드 여행》으로 문장력을 인정받았고, 《과테말라의 동생》 《검표원이여, 오늘 밤도 고마워》 등 에세이집을 출간했다.

역자 : 권남희
1966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번역에 살고 죽고』, 『동경신혼일기』, 『번역은 내 운명』(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캔 커피』, 『애도하는 사람』, 『러브레터』, 『무라카미 라디오』, 『빵가게 재습격』, 『밤의 피크닉』, 『퍼레이드』, 『달팽이 식당』, 『다카페 일기』,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 『카모메 식당』, 『부드러운 볼』, 『어제의 세계』, 『아기 달팽이의 집』, 『나무는 변신쟁이』, 「마녀배달부 키키」 시리즈 등이 있다.

글, 사진: 땡스북스 고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