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2일 ~ 11월 28일
땡스북스 금주의 책

파란막대 파란상자
사계절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저, 이지원 역

<파란막대 파란상자>는 이상한 그림책이다.
첫째, 앞표지와 뒷표지의 구분이 없고,
둘째, 제목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헷갈리고,
셋째, 책을 어디서부터 읽어야 할지 모르겠고,
넷째, 폴란드 작가의 작품이지만 모든 판권이 국내 출판사에 있는 그림책이기 때문이다.

이 이상한 그림책은 책의 앞면과 뒷면 모두 각각의 제목을 가지고 있다. 문득 <냉정과 열정 사이>가 생각났다. <냉정과 열정 사이>가 한 소설을 남자와 여자 각각의 시선에서 읽는 분리된 책이라면, <파란막대 파란상자>는 비슷한 줄거리를 가진 두 편의 이야기가 각각 책의 앞뒤 양방향에서 출발해 한가운데서 만나는 독특한 형식의 그림책이다. ‘파란막대’는 여자아이의 이야기로, ‘파란상자’는 남자아이의 이야기로 꾸며졌다. 양쪽의 무게중심이 똑같기 때문에 이 책의 제목을 ‘파란막대 파란상자’라고 불러야 할지, ‘파란상자 파란막대’라고 불러야 할지 종잡을 수 없다. 따라서 이 책의 시작을 어디로 봐야 할지 역시 알 수 없다.


내가 선택한 것은 ‘파란 상자’였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러했다. 아홉 살 생일에 남자아이 에릭은 집안 대대로 남자아이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상자 하나를 선물로 받는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진 파란색 상자이다. 이 특별한 선물은 아무런 단서도 없이 주어진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어떻게 쓰는 물건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함께 건네진 낡은 공책 속에, 앞서 그것을 받은 사람들의 사용기가 적혀 있다.

‘과연 파란 상자에 무엇을 담았을까?’하고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예측불허의 답들이 쏟아져 나왔다. 상자 안에 거울을 붙여 자신의 내면을 비추어보던 아이도 있었고, 상자 안에 100명의 사람을 넣은 아이, 세 개의 주사위를 넣어 조언을 구한 아이, 모래시계를 만들어 자기만의 시간을 재던 아이, 도자기로 만든 코끼리 인형에게 상자 안에 스케이트장을 만들어 준 아이 등등 무엇을 ‘담을지’만 생각했던 나의 예상을 뛰어넘는 다양한 활용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상자는 담을 때 쓸 수도 있지만 엎어두고 높이를 이용할 수도 있고 옆으로 세울 수도 있으며 그 안에 물건 대신 물을 부어 얼릴 수도 있다니.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한 편 한 편의 작품처럼 느껴지는 그림과 상상을 자극하는 글이 있어 참 오래 들여다 보게 했다.


그 기상천외한 기록들을 읽고 난 에릭은 공책을 덮으며 생각한다. '다음 사람에게 물려주기 전에, 나도 이 공책에 멋진 이야기를 적어 놓을 테야!' 그렇게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트레이싱지에 뚜껑이 열린 파란 상자가 나오고, 투사지 뒤에 파란 막대가 비쳐 보인다. 파란 막대는 아마 그 상자에서 나왔겠구나 싶은, 막대의 원래 자리가 상자인 듯 싶은 꼭 맞는 크기다.


사실 그 다음 내용은 책을 완전히 뒤집어서 여자아이가 나오는 ‘파란 막대’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막대와 상자가 마주친 장면이 있기 때문에 문득 이 두 이야기 속 아이들도 만나게 되거나 이야기 속에서 두 물건이 교차할 것이라는 상상을 했다. 그런 작은 호기심을 갖고 처음으로 돌아가듯 뒤에서부터 책을 읽는 과정은 이 이상한 그림책의 또다른 매력이다.


파란 막대 역시 여자아이 클라라에게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가 전해준 특별한 선물이다. 그 막대를 이용한 놀이 역시 아주 많지만 하나하나 의미 있는 놀이이기도 하고, 그만큼 마음을 설레게 하는 놀이이기도 하다.


그림책을 읽고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추리소설을 읽는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다음 페이지에 나올 내용을 추측하고 있었다. ‘내가 만약 파란 상자를 선물로 받는다면 뭘 하고 놀까?’ ‘내가 만약 파란 막대를 선물로 받는다면 뭘 하고 놀까?’ 이 책 한 권으로 다양한 생각들이 마구 쏟아진다. 이 이상한 그림책은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인 것 같다.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그림에 수많은 상징과 은유가 숨어 있어 끝없는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이 책을 덮으면서 나 역시 먼훗날 태어날 내 아이에게 세월의 흔적을 품은 뭔가를 전해줄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든 쉽게 사고 쉽게 버리는 요즘 시대에 손때를 타고 오래오래 전해져오는 물건. 바로 이 이상한 그림책이 그 선물이 된다면 참 좋겠다.




저자: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폴란드 출신인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는 동화 작가이다. 그녀는 폴란드 토루인에서 태어나 코페르니쿠스 대학 미술학부를 졸업하고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생각>, <발가락> 출간을 계기로 한국을 방문하여 우리 문화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특히 한글 자모의 간결한 논리성에 매혹되어 글자그림책 작업을 하게 되었다. 흐미엘레프스카의 그림책은 질감과 문양이 다른 종이와 천을 이용한 콜라주와 다양한 채색 기법을 사용하여 기발한 아이디어가 넘치며, 철학적인 사색의 깊이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면서 수십 권이 넘는 어른과 어린이 책에 그림을 그렸다. 2000년에 <아저씨와 고양이>로 프로 볼로냐상을, 2003년에 야스노젬스카의 <시화집>으로 바르샤바 국제 책 예술제에서 '책예술상'을 수상하였다.

글, 사진: 땡스북스 정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