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29일 ~ 2월 4일
땡스북스 금주의 책

삶의 격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
은행나무
페터 비에리 지음/문항심 번역

나는 현재 품격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답은 '아니오’다. 품격을 논하기엔 현실적인 구차함이 감춰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삶이 즐겁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나름 기쁨과 보람도 크고 즐거운 일들도 많지만 품격이 있다고 말하기엔 자신이 없다.

그래서 하얀색 표지의 《삶의 격》을 처음 봤을 때 오랫동안 들여다 봤다. 독일어 원제의 제목을 알아보니 《Eine Art Zu Leben 삶의 한가지 방식》 부제는 '인간 존엄의 다양함에 대하여’다. 한글 제목도 나쁘지 않지만 원제가 더 책 내용과 일치하고 명확하다.

책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내용이 재미없고 글이 지루해서가 아니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다. 책을 읽으며 깊이 있는 생각을 많이 했다. 페터 비에리는 자아를 가지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기본적인 특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남을 어떻게 대하는가? 그리고 나는 나에게 어떻게 대하는가? 라는 세 가지 관점으로 인간의 존엄성 문제를 바라본다.

p.179
존엄성 없는 헤어짐은 어떤 모습일까? 자가가 잘한 것, 억울한 것만 생각하고 상대방을 절대 봐주지 않는, 증오와 비난으로 가득차 줄다리기를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다. 한 발짝 떨어져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모른다. 재고 따지고 손익을 계산한다. 자기만 옳고 온갖 치사한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헤어짐이라는 것은 모든 관계가 곧 자기가 놓쳐버린 삶이요, 어쩌면 그리 살았을지도 모르는, 그러나 살아보지 못한 삶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별을 할 때는 앞서 말한 열린 미래가 특히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상대방에게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비록 그 미래의 길이 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라고해도 그렇다.

p.245
"그렇다면 존엄성은 무엇인가?" "사적인 것에 대해서 말을 아낌으로써 타인과의 사이에서 유지되는 간격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간격이 필요한 이유는, 침묵의 경도를 조금 무르게 함으로써 사람 사이의 친밀감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유리처럼 투명하다면 친밀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좁혀야 할 거리라는 것이 애초부터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모두에 대해서 다 알고, 그 중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정해져 있다면 그것으로 이야기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결국 단순하고 뻔한 이야기 밖에 될 수 없다. 친밀성이 자아내는 신비한 마법도, 마법이 만들어내는 행복도 없다. ”

p.273
우리는 일생의 대부분을 타인의 시선 아래 살아간다. 그래서 특정한 방식으로 우리를 내보이며 특정한 얼굴로 그들을 대한다. 이 얼굴은 사회적인 표면, 가시적인 정체성, 그 뒤에 숨을 수 있는 가면이다. '얼굴’이라는 말을 좁은 의미로 보자면 말 그대로 우리가 얼굴에 나타내는 표정과 기색을 뜻한다. 그런데 그 밖에도 얼굴 표정과는 관계없는 많은 것들이 얼굴이라는 말뜻에 들어 있다. 사회적 역할, 능력과 영향력과 권력 같은 것들, 흔히 성격이라고 부르는 습관과 사고방식, 외부로 표출되는 사고와 감정 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평생 동안 끊임없이 사회적 얼굴, 즉 체면을 다듬어나간다.

p.310~313
사람이 자기 스스로에게 책임을 진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행위를 포함한다. 신념, 감정, 의지, 살아가는 총체적 방법 등이 이에 들어간다. 이것은 타인과 자신을 구분 짓는 능력과 용기를 의미한다. 이것은 또 다른 면에서 갈등을 회피하지 않는 강함을 뜻한다. 여기서 자기존중은 두려움이 없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중략…) “인생에 책임을 진다는 것,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를 뜻한다네. 이해하는 것, 그리고 인정하는 것. 그런 다음에 세상을 향해 얼굴을 돌려 이렇게 외치는 거라네. 그래, 다 내가 했어! 아니, 더 좋은 건 이렇게 외치는 거야. 이 모든 것이 내 모습이야!”

p.394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의식을 기르기 위해 죽음을 앞둬야 할 필요는 물론 없을것이다. 상상 속에서 생의 마지막까지 가보고 그 종말의 순간에 서서 지금 매일매일을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 수는 없다. 비록 세간에는 그렇게 하라는 솔깃한 문구가 있기는 하지만 생각해보면 앞뒤가 잘 맞지 않는 말이다. 매일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산다면 연달아 존재하는 수많은 날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여러 일들을 기반으로 하는 연속적 인생이 불가능하게 된다. 자신이 정한 사물의 무게가 바람직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마지막에서부터 인생을 바라본다면 무엇인가가 아주 천천히, 고되게, 힘든 과정을 거쳐서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내 의식 안으로 새롭게 들어오는 욕구와 그 인생을 대비해보는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절실한 삶에는 인간의 존엄성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어렵고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엄성이라는 단어의 무게감에서 벗어나면 조금 쉬워진다. 페터 비에리는 우리를 그 길로 안내한다. 풍부한 예시와 논증을 통해 여러 가지 입장을 소개하고 독자가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고 선택하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존엄성은 거창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처럼 삶의 한가지 방식으로 이해해보자. 그것도 아주 실용적이고 지혜로운 방식이다. 알면 실천했었을 텐데 몰라서 못했던 방식들이다.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소통하고, 서로를 이끌어주며 상처없이 잘못을 고쳐주고, 다같이 즐겁게 성장할 수 있는 멋진 길이다. 이 책 덕분에 앞으로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스스로 품격있는 삶이라고 뿌듯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 스스로 자립성과 진실성, 그리고 가치 있는 삶에 대한 기준을 바로 세워 나가야 하는 점은 언제나 의무처럼 따라다닌다.

지은이: 페터 비에리
1944년 스위스 베른에서 태어났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버클리 대학, 하버드 대학, 베를린 자유대학 등 여러 곳에서 연구 활동을 했으며, 마그데부르크 대학 철학사 교수 및 베를린 자유대학 언어철학 교수를 역임했다. 주요 저작으로 《자유의 기술》(2001), 《어떻게 살 것인가?》(2011) 등이 있다. 창작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 '파스칼 메르시어’라는 필명으로 《페를만의 침묵》(1995), 《피아노 조율사》(1998), 《리스본행 야간열차》(2004), 《레아》(2007) 등 여러 권의 소설을 발표했다. 현재 인간의 정신세계, 철학적 인식의 문제, 언어철학 등 폭넓은 인문학 분야를 아우르며 연구 및 저술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옮긴이: 문항심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학에서 마기스터 학위를 받았다. 베를린 자유대학 도서관과 훔볼트대학 도서관에서 근무했으며 현재 독일에 거주하면서 독일문학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베를린 대왕》, 《비를 먹는 사람들의 도시》, 《사로잡힌 꿈들의 밤》, 《미무스》, 《그것이 어떻게 빛나는지》, 《패배자들의 도시》, 《시간을 여행하는 소녀》(3부작) 등이 있다..

글, 사진: 땡스북스 이기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