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6일 ~ 12월 22일
땡스북스 금주의 책

요즘 우울하십니까?
문학동네
김언희 저

가까스로 生

1. 에필로그로 여는 프롤로그


너는 네가 몇 살인지 모른다. 너는 너무 늙어 가죽이 다 벗겨지고 뼈가 살을 뚫고 나와 있다. 찌그러진 젖퉁이에 좆까지 합쳐 단 노파 놈. 너는 네가 노인인지 노파인지도 모른다. 네 원수는 벌써 너를 잊었다. 네 성기조차도 너를 잊었다. 너는 가공의 하늘에 떠 있는 가공의 구름이다. 마술사는 너를 무대 위의 허공에 둥둥 떠 있게 하고는 그냥 가버렸다.

「에필로그」

하지만 너는 원수를 잊지 않았고, 너는 성기를 잊지 않았고, 여기서 분노는 시작되고, 더러움은 시작되고,




2. 끝까지 할 것

네 발로 등장하고 당연히 퇴장도 네 발로 해야지

「지문 104」 중

분명 이 문장에서 시는 시작됐을 거야
이 문장을 넣기 위해 시는 만들어졌을 거고
그렇게 시 속에 숨어들어 간 이 문장을 보며 당신은 웃었을 거야
덕분에 나도 웃어
난 주인공이 되고 싶어졌어
내네 발로 등장하고 내네 발로 퇴장하겠어



(…)
겨우 세운 좆 움겨쥐고 시 쓰러 가는 병
(…)
어떻게 하면 만인이 자고 싶은 여자가 되나 노심초사하는 병
(…)
할지도 모르는 짓 때문에 따귀 먼저 맞아두는 병
(…)
어제만 해도 몰랐던 것을
오늘 알고 마는 병

「지병의 목록」 중

나도 나도 지병이 있지. 겨우 세운 시 움켜쥐고 죽 쑤러 가는 병. 어떻게 하면 만인과 자고 싶은 사람이 되나 노심초사하는 병. 맞을지도 모르는 따귀 때문에 뭐라도 먼저 해 두는 병.
어제만 해도 몰랐던 병을 오늘 알고 마는 것.



(…) 적당하게 더러운 인생보다 더, 더러운 인생은, 없어, (…)

「아직도 무엇이」 중

그러니 더 더러워져야 하고. 끝까지 더러워져야 하고.


이 음성 다중 섹스트의 웃어넘길 수 없는 서브플롯을 들추어보겠다고 팔뚝을 걷어붙이지 마시오. 걷어붙였다 해도 팔뚝까지 밀어넣진 마시오. 아무리 윤활유로 떡칠을

했다 해도, 아무리 섹스나 살인이나 그게 그거라 해도, 상호 처형이면서 자기 처형이기도 한 이런 성적 실천, 이런 미적 실천은 내장을 파열시킬지 모른다고, 대장항문과 의사들은 누차 경고했소.

시적 충동이나 성적 충동이나 아무리 그게 그거라 해도, 이 시집에 부착된 나일론 노끈은 자위용 혹은 자해용으로밖에는 쓰일 데가 없소. 쓰일 데라고는

없소. 늙은이는 너무 늙어서 못 읽고, 젊은이는 너무 젊어서 못 읽는 대전발 0시 50분, 이 시는 한물간 아르방가드의 물색없는 십팔번일 뿐이오. 그건 그렇고

목포는 왜 가는 거요? 부득부득 완행열차를 타고, 딴 멱을 또 따면서

「추신」

“밖에”라니요. 자위하고 자해할 수 있다면 충분한 걸요. 짜릿하고 저릿할 수 있다면. 서브플롯은 궁금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팔뚝은 걷을게요. 짜릿하고 저릿할 시간이거든요. 한물간 아가리방드와 물색없이 씹할.


아침부터 썩어 있을 권리가 있고
하루를 구토로 시작할 권리가 있소
매사에 무능할 권리가 있고
누구나 알아듣는 것을 나만 못 알아들을 권리가 있소
껌껌한 콘크리트 방주를 타고 밤마다 대홍수의 꿈을 꿀 권리가 있소
머리 위로 똥덩이가 둥둥 떠다니는 꿈을 밤마다 꿀 권리가 있소
에미 애비도 몰라볼 권리가 있고 딱 오 분만 모친의 부고(訃告)를 즐길 권리가 있소
곡(哭)을 하면서 다리를 떨 권리가 있고 병풍 뒤에서 휘파람을 불 권리가 있소
파니스 안젤리쿠스를 페니스 안젤리쿠스로 번번이 고쳐 들을 권리가 있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수음을 할 권리가 있소
더이상 미래가 궁금하지 않을 권리가 있고
젓가락 행진곡만 삼십 년을 칠 권리가 피가 나도록 칠 권리가 있소
단고기를 입에 물고 있으면서도 단고기 생각을 할 권리가 있고
착잡하게 시작해서 찜찜하게 끝을 볼 권리가 있소
소리만 철퍽대다 끝낼 권리가 있소
인생을 바꾸려고 하루 오백 번 항문을 조일 권리가 있고
믿는 도끼에 발등을 대줄 권리가 있소
먼눈이 또 멀 권리가 있고
무엇보다 발가락으로 젓가락질을 할 권리가 있소
대공원의 비둘기가 내 정수리에 버젓이
똥을 눌 권리가 있는 것처럼

「마그나 카르타 - 선언하면서 동시에 절규할 수 있다면」

내게는 권리가 이다지도 많은데 나는 자꾸 똥을 맞네.
내 정수리는 비둘기의 옥좌 너의 변기.
나는 권리가 있다! 동시에 똥간이다!




3. 그러므로 혹은 그럼에도 융모가 돋고 사랑을 만나고 환희가 오고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후희중입니다

두 눈을 의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후회중이 아니라
후희중

예, 바로 그
후희(後戱)
맞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잠시」

잠시만
기다리겠습니다

(분노) 후 희중이니까요

의심하긴요 심심은 합니다만
(분노) 후 회보다는 역시
희가

예, 바로 그 희가
찾아듭니다.

잠시,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
손가락이 닿은 곳은 모두 검은
멍이 남는다 검은 멍에서 짧고
부드러운 융모가 돋는다

「멍」 중

“남는다”를 ‘남아서’ 혹은 ‘남지만’으로 고쳐 쓰고 싶네요. 두 문장이 그렇게 이어졌으면 해요. 그러므로 혹은 그럼에도 짧고 부드러운 융모는 돋으니까요.



(…) 입술을
똥구멍처럼 오므리고서 빠끔빠끔
도넛을 불어 날리는 세상에서 가장
심드렁한 뻐드렁니 당신이 맘에 들어

「뻐드렁니」 중

똥간은 뻐드렁니를 만났네. 똥구멍처럼 오므린 입술 안에 있는 뻐드렁니를. 뻐드렁니를 싸면 똥간은 받고, 아마도 이건 사랑이고.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는 맛이었어, 무서운 지렛대였어, 냄새만 맡아도 살 것 같은 음문이었어, 냄새만 맡아도 미칠 것 같은 질문이었어, 지칠 줄 모르고 반복되는 후렴이었어, 지칠 줄 모르는 후렴의 후장이었어, 웃으며 건너는 썩은 출렁다리였어, 썩은 다리 위에서 흔들거리는 회중시계였어, 백발삼천장의 음몽이었어, 내 몸이 용문 객잔이었어, 더러움 뒤에 있는 환희, 더러움 뒤에 있는 용문이었어, 용문의 뒷맛이었어,
「용문(龍門)의 뒷맛」

음문이 질문이었어, 지칠 줄 모르고 반복되는, 이를테면 840번 반복되는 질문이었어, 840번의 더러움 지나 환희가 왔고, 환희는 뒷맛이었어, 음문이었어.
음문과 환희는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었어.




4. 하지만 다시 똥과 구린내 하지만


1
밥상 위의 파리가 엉겁결에 밥상 위의 파리가 되고 만 것처럼
金 역시 엉겁결에 金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엉겁결에

2
아무도 金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金은 숨었을 것이다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3
목을 맬 때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金이 물었을 것이다
별생각 없을 거야, 金이 대답했을 것이다

4
金이 입을 열자마자 金은 귀머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金이 귀를 기울이자마자 金은 벙어리가 되었을 것이다
金이 金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황홀경이었을 것이다

5
늘 웃을 곳이 아닌 데서 웃었을 것이다 金은 울 곳이 아닌 데서 울었을 것이다 金의 웃음은 어떤 울음으로도 울어지지 않는 울음이었을 것이다 金의 울음은 어떤 웃음으로도 웃어지지 않는 웃음이었을 것이다 늘 할 곳이 아닌 데서 했을 것이다 金은 늘 눌 곳이 아닌 데서 누었을 것이다 金조차 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金은 점점 더 웃기는 존재가 되어갔을 것이다 金은 金을 악물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악물어도 금방 벌어지곤 했을 것이다 헤벌쭉

6
金에게서 金이 꾸덕꾸덕 벗겨져 일어나기 시작했을 때, 金은 金의 끝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金을 金이, 金이 金을, 깎아 질렀을, 새파랗게 깎아 질렸을, 그곳에서 金은 서서히 金으로 메워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흉가의 아궁이처럼

7
사실 金은 金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한평생 金은 金의 뒤통수를 흘낏거렸을 것이다 자면서도 흘낏거렸을 것이다 金은 金에게 한평생 뒤통수만 보여주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8
심지어는 실종되거나 망각된 적도 없었기 때문에
金은 발견될 수도 기억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9
그럼에도, 金은 金과 하나였을 것이다 똥과 구린내처럼
그럼에도, 金은 金에게 말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金은 金을 볼 때마다 게웠을 것이다

「벡사시옹(vexations)」




1
엉겁결에 金이 되었겠지. 별생각 없이 목을 맬 거고. 네가 쇳덩이인지 금덩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네 목소리를 못 듣고 너는 네게 말하지 못해.
네 웃음과 울음은 때와 장소에 어긋나. 웃음이 웃음이지도 못하고 울음이 울음이지도 못해. 너는 너를 이해하지 않으려 하는 것 같네. 왜? 너는 금덩이니까 너는 쇳덩이가 아니니까. 그래?
너는 너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어. 한평생 뒤통수나 흘낏거렸을 거야.
그럼에도, 너는 너와 하나였을 거야. 똥과 구린내처럼.
그럼에도, 너는 네게 말을 놓지 않았겠지. 너는 금덩이고 너는 쇳덩이가 아니니까.
그럼에도, 너는 너를 보며 게웠을 거야.

2
'벡사시옹'은 에릭 사티가 지은 악보로 한 페이지의 테마를 840번 반복하도록 되어 있다. 연주 시간은 10시간을 훌쩍 넘긴다. 840번 반복되는 1페이지. 1페이지와 2페이지는 같고 1페이지와 840페이지는 같다. '벡사시옹'의 뜻은 '짜증'이다.

3
840페이지는 1페이지를 이해하지 않으려 하는 것 같네. 왜지? 너는 840페이지니까 너는 1페이지가 아니니까. 그래?
너는 네게 말을 놓지 않았겠고, 그럼에도 너를 볼 때마다 게웠겠지만, 그럼에도 너는 너와 한 페이지였을 거야. 840번의 '짜증'나는 반복 중 하나이자 전부였을 거야. 그래?

4
'벡사시옹'이 완주되기 전에 대부분의 청중은 나갔다. 남아 있던 청중들은 처음엔 경청하다 나중엔 음식을 먹고 잠을 자는 등 딴짓을 했다. 아마도 이런 식이었을 것이다. 24페이지엔 과자가 등장했고 168페이지에는 잡담이 섞였고 447페이지에는 코 고는 소리가 얹히지 않았을까. 840페이지가 끝난 뒤 남은 사람은 몇 되지 않았는데, 그 중 한 명이 땀을 뻘뻘 흘리며 앙코르를 외쳤다고 한다. 840페이지에는 누군가의 땀과 박수가 묻었다.

5
그럼에도 1페이지와 840페이지는 같은 악보인가? 그렇지 않다. 시는 그럼에도 같다고 말하는 것 같지만 난 그럼에도 다르다고 말하겠다. 시가 틀렸다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으로 간신히 살 수 있나? 어제와 똑같은 오늘에 등장하는 과자와 오늘과 똑같을 내일에 등장하는 잡담과 달콤한 잠으로. 그렇게 840페이지를 보낸 이만이 땀을 뻘뻘 흘리며 '이 생을 다시 한 번 더!'라 외칠 수 있다.

6
그런 것이야말로 가까스로 生이다.




0. 시로 여는 에필로그


변기에 앉아서는 시를 읽읍시다 여보

번번이 족집게가 흰 터럭을 놓치는 아침에도

변기에 앉아서는 일단 시부터 읽읍시다

변의 안색을 살피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묽거나 굵거나 길거나 짧은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정색을 하고, 정색(正色)을 하고 여보

우리는 천 번도 더 같은 곳에 누었으니까

금방 터질 댐 같은 얼굴을 하고 당신도

나도 아니까 이제 아니까 시를 쓰지 않는 긍지를

「시로 여는 아침」

그럽시다 여보. 묽거나 굵거나 길거나 짧거나 똥인 건 매한가지인 하루를 시로 엽시다. 천 밤을 자고 천한 번째 아침을 맞았으니까 변을 보기 전에 시를 봅시다 여보.




저자 : 김언희
1953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으며 경상대학교 외국어 교육과를 졸업하였다. 1989년 〈현대시학〉으로 문단에 등단하였으며 경남문학상, 박인환 문학상 특별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시집 『트렁크』『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뜻밖의 대답』『요즘 우울하십니까?』 등이 있다.

글, 사진: 땡스북스 이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