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0일 ~ 1월 16일
땡스북스 금주의 책

어릴 적 그 책
앨리스
곽아람 저

전직이 어린이였던 어른들에게 주는 책

<어릴 적 그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유년시절 우리 집 거실 한편을 꽉 채웠던 전집 시리즈들이 자동 연상되었다. 밥을 먹을 때도 화장실을 갈 때도 손에서 놓는 법이 없었던, 나의 어린 시절을 촘촘히 채워준 책들. 막연히 책 읽는 게 좋았던 어린 시절 나는, 자연스럽게 출판사에서 책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고,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서점에서 책 파는 일을 하고 있다. 지금의 나를 만든 8할은 지난 날 내가 읽었던 책들과 책을 읽는 순간의 행복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은?’이라는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위 ‘고전’을 얘기하곤 한다. 어느 날 문득 저자는 ‘과연 고전이 나를 만들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로 지금의 나를 이루어낸 것은 ‘최초의 글자 있는 책’이었던 디즈니 명작전집, <소공녀><사자왕 형제의 모험><계몽사 북유럽 동화집> 같은 책들이었다고 한다. 책장이 헤어질 정도로 거듭 읽은 책들은 오히려 유년의 책장에 있었고, 이 책들이 어린 뇌에 각인돼 자신의 사고방식, 생활 습관, 지향점까지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P.26-27
30대에 접어들면서, 나는 종종 자문했다.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인가.’ 직장 생활은 안정됐고, 돈도 제법 모였다. 꽤 넓은 집으로 이사도 했다. 사회에서는 나를 ‘아무것도 아쉬울 게 없는 골드미스’라 불렀다. 그러나 나는 자주 스스로를 껍데기처럼 느꼈다. 퇴근 후 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있다가도 어느 순간 나는 끝없이 내 안으로 침잠했다. 서러운 일들에 무뎌졌지만, 그렇다고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궁금했다. 내 바닥에는 뭐가 있을까? (……) 가장 밑바닥에서 굳은 심지처럼 나를 지탱해주는 것은 뭘까? 그래서 몰두했다. 추억의 책 모으기에.

그래서 저자는 소환할 수 없는 유년시절의 자신 대신 그 시절을 간직해주고 있던 책들을 모았다. <어릴 적 그 책>은 저자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 ‘실레비펜’을 실마리 삼아 초록색 표지의 하드커버 책으로만 기억했던 계몽사 <어린이 세계의 명작>의 존재를 새삼 깨닫고, 이후 3년여에 걸쳐 어린 시절 읽어온 책들이 그린 지도를 되짚어가며 그것들을 하나하나 모아가는 과정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어렵게 손에 넣은 책들을 읽으며 어릴 적 자신을 불러내 마주 앉아 거울처럼 서로를 들여다보던 시간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P.324-325
쓸쓸한 날이면 낡은 책을 펼치고 킁킁대며 그리운 옛날의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책을 읽었다. 나 자신이 가치 없게 느껴진 날, 엉망진창이었던 하루를 가까스로 버텨낸 날, 곧은 마음씨의 공주님, 전쟁을 이겨낸 어린이들, 남들과 달라지길 원했던 용기 있는 소녀의 이야기를 읽으며 위로 받았다. 동화 속 주인공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며 마음을 다잡는 것은 아주 어릴 때부터의 버릇이었다.”

또한 저자는 어린 시절의 책들을 다시 찾아 읽으며, ‘지금의 나’가 된 것은 이 책들의 양식을 먹고 자랐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책은 경남의 소도시에서 살던 어린아이에게 옛 일본인들의 복식과 르네상스 시대나 로코코 시대의 복식은 물론 서양 신화 속 트롤의 생김새까지, 전 세계의 문화를 가르쳐주었다. 저자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 한 번도 미술관에 가본 적 없었던 자신이 유럽 회화를 좋아하게 된 것은 어릴 적 읽은 책들 덕분이라고 말한다. 책이 가르쳐준 것은 외국 문화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한때 여자아이들이라면 책상 밑에 숨겨놓고 돌려가며 읽었던 <다락방의 꽃들> 같은 책에서 성(性)을 배웠고, 소녀들을 타깃으로 한 가벼운 읽을거리들에서도 친구들과의 관계를 쌓아가는 법이라든가 긍정적인 마음가짐, 꿈을 이루기 위한 의지 등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을 배웠다.

P.42
지방 도시에 대한 편견을 가진 서울 사람들이 간혹 내게 묻곤 했다. “너는 시골서 자랐는데, 어떻게 그림을 좋아하게 됐어?” “맥도날드도 없었던 진주 출신이 어떻게 명문대에 들어가고 기자가 될 수 있었지?” 번화한 대도시에 살면서 문화의 세례를 직접 받아야만 안목을 키울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나는 말해주고 싶다. 세상엔 책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고. 시골집의 작은방에 점처럼 웅크리고 앉아 책을 통해 자신과 드넓은 세계를 연결해본 어린 독학자(獨學者)들의 내면에는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깊고, 넓고, 아름다운 세계가 성(城)처럼 단단하게 구축되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대학에 입학해 서울에서 살게 되면서 저자는 홀로 서야 했다. 모든 어른아이가 그러하듯, 약한 모습을 밖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애써 공격적으로 행동하고 일부러 험하게 굴고 의식적으로 날을 세우며 살았다. 그러던 중, 어린 시절의 책들을 수집하고 다시 읽는 시간은 저자에게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P. 27
“전쟁 같은 주중이 지나가고 고요한 주말이 오면 집에 홀로 앉아 동화책을 읽었다.
25년 후의 내가, 25년 전의 어린 내게 반갑다며 청하는 악수,
혹은 25년 전의 내가, 25년 후 어른이 된 내게 잘 살아와 고맙다며 건네는 격려 같은 시간이었다.”

직장에서 부당한 모욕을 당한 날 다시 읽은 <소공녀>는 “단순한 소녀소설이 아니라 온실 속 화초로 자란 어린아이가 이전투구(泥田鬪狗)로 얼룩진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에 대한 예리한 분석서”로서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또한 결혼과 아이라는 인생의 통과의례에서 빗겨 나 있다는 소외감과 자책감을 느꼈던 날, <추위를 싫어한 펭귄>을 읽으면서 ‘여자라면 아이를 좋아해야 한다’ 혹은 ‘인간이라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사회의 고정관념이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는 확인을 받고 깊이 위로를 받는 식이다.

이렇게 어린 시절의 책들은 지은이에게 가르침과 즐거움과 삶을 살아나가는 힘을 주는 존재로서 다시 자리 잡는다. 책으로 세상을 배운 어린 독학자가 더 이상 울지 않는 어른이 되어, 날마다 삶과 분투하며 좌절과 성장을 거듭하는 모습에서 어렵지 않게 자기 자신의 파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말괄량이 삐삐』의 작가로 유명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이런 말을 했다.
"기억은 남모르게 잠들어 있는 보물을 품고 있다. 지나간 어린 시절의 향기와 맛과 소리를."
저자의 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보물은 바로 자신이 어릴 적 읽었던 동화책이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저자처럼 ‘어릴 적 그 책’을 통해 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보물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덧.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머릿속에도 ‘반짝’ 하고 떠오르는 어린 시절 책 한 권이 있었다. 밀가루 반죽으로 빚은 듯한 오이 모양의 생명체가 등장하는 책이었는데, 일러스트가 특이해 인상 깊게 읽었던 책이었다. 이 책을 덮는 순간, 나 역시 <어릴 적 그 책>의 저자처럼 지금은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그 책을 찾아내고 싶은 모험심이 강하게 들었다. 검색에 검색을 거듭한 결과 알아낸 그 책의 제목은 <오이대왕>이었다. 1997년 처음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고 하는데, 그해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나에게 축축하고 물컹한 데다, 싹이 난 감자 따위나 먹는 불쾌한 존재로 묘사되는 ‘오이대왕’이 강렬하게 남은 것이었다. 만약 <어릴 적 그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내 오래된 기억 속의 <오이대왕>이 20년이란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의 내 앞에 나타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새해 첫 독서로 이 책을 읽은 의미는 충분했다.



저자: 곽아람
1979년 부산에서 태어나 경남 진주에서 자랐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 미술사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2003년 1월 조선일보사에 입사해 사회부, 인터넷뉴스부, 편집부, 전국뉴스부 등을 거쳤다. 현재 인물·동정을 다루는 사람들팀 기자로 일하고 있다. 2008년 상반기동안 조선일보 주말섹션 ‘Why’에 미술사의 걸작들을 소개하는 ‘곽아람의 명작파일’을 연재했다. 지은 책으로 『그림이 그녀에게』(2008),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2009)가 있다. 좋아하는 작가는 일본 에세이스트 요네하라 마리(米原万里). 언젠가는 그녀를 능가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2010년 3월부터 어린 시절에 푹 빠져 읽었던 책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주로 1980~90년대 아동 도서들을 모았으며, '추억의 책장'을 채운 책들은 330여 권에 달한다. 틈틈이 모아둔 책들을 다시 꺼내 읽으며 어린 날을 추억한다. 언젠가 결혼해 아이가 생기면, 그 책들과 함께 이 책에 담은 유년의 행복한 기억도 물려주고 싶다.

글, 사진 : 땡스북스 정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