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28일 ~ 9월 3일
땡스북스 금주의 책

창작의 힘
마음산책
유경희 저

유럽의 미술관들을 다닐 때 줄곧 머릿속에 맴돌았던 생각은 '이건 정말 미쳐야만 가능한 그림이야.'라는 것과 '그럼 평생을 그림에 미치게 한 그 힘은 무엇일까?'하는 것이었다. 많은 그림을 보고 감탄하고 왔지만 아쉽게도 이 궁금증은 미처 해결하지 못하던 차에 우연히 이 책의 머리말을 접했고, 홀린 듯 읽게 되었다.

P.10
일상에서가 아니면 보기 힘든 예술가들의 유별난 기질과 성격과 습관과 기벽과 취향은 말 그대로 예술가 자신에 관한 섬세하고 내밀한 역사와 개인적 무의식을 엿보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대로 창작의 역동이 된다. 그러니까 예술가들의 독특하고 기이하고 그로테스크한 기질과 취향에도 불구하고 걸작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괴상한 성질머리와 기이한 취향 덕분에 명작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창작의 힘>에서는 10인 10색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예술가 24인의 24색을 엿볼 수 있었다. 가장 좋았던 건 예술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익숙한 예술가들의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다뤘다는 점이었다. 나는 작품을 감상할 때, 작품과 작가를 떼어서 감상해서는 안 된다는 주의라 작품에 녹아있는 작가의 모습을 찾아보려고 하는 편이다. 하지만 어깨너머로 배운 도상학적 감상으로는 미처 알 수 없었던 작가의 은밀한(?) 사생활과 성격을 하나씩 읽어갈수록 이들의 인간적인 모습에 깜짝 놀랐다. 나는 내심 '예술가라면 예민한 성격은 물론이요 외골수 같은 모습은 기본적으로 갖춰야지'라는 막연한 상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마네는 그 누구보다 사교의 제왕이었고, 클림트는 자신의 모델들을 늘 어떤 식으로든 돕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오키프는 85세의 나이에 26살 소울메이트를 만나 죽는 그 날까지 함께 했다! 읽는 내내 가슴 한쪽이 찡해지기도 하고 독특한 에피소드에 웃음이 절로 나오기도 했다.

P.114~116
뭉크가 그림을 사랑한다고 해서 자식처럼 잘 보살핀 것은 아니었다. 말년에 그는 야외 작업실에서 많은 작업을 했는데 완성작을 바람, 비, 태양, 눈에 그대로 방치했다. (중략) 방문객이 필생의 역작을 함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자 뭉크는 “그렇게 하면 그림이 자활하는 데 도움이 된다네”라고 대답했을 정도다.

P.204
마네가 얼마나 위트 넘치는 사람인지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어떤 화상이 <아스파라거스 다발>을 샀는데 그 그림이 아주 마음에 든다며 200프랑을 얹어주었다. 마네는 곧장 아스파라거스 한 줄기를 그려 “선생님이 사가신 그림에서 한 줄기가 빠졌더군요!”라고 적은 쪽지와 함께 새 그림을 화상에게 선물로 주었다.

P.243
유명 화상이었던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화를 그릴 때였다. 세잔은 볼라르에게 아침 8시부터 밤 11시 반까지 휴식도 없이 흔들거리는 포장용 상자 위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으라고 강요했다. 하루는 볼라르가 졸다가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세잔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사과가 움직이는 거 봤어?” 그 후 볼라르는 의자에 앉기 전 엄청난 양의 커피를 마셔야 했다.

한편으론 이들이 미쳐있던 것들을 볼 땐 <자기 앞의 생>에서 읽었던 “미친 사람들만이 생의 맛을 알 수 있어.”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24인의 예술가들은 확실히 무언가에 미쳐있었다. 사랑에, 꽃에, 수집에, 죽음에, 심지어 미소년에게까지 말이다. 이들은 짧은 생을 뜨겁게 맛보았고 그 흔적으로 그림을 남긴 것이었다.

P.92
이혼의 결정적 사유는 프리다의 친동생 크리스티나와 디에고의 불륜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에고에 대한 프리다의 사랑은 더욱더 견고해진다. 이때 그녀가 받은 고통과 절망은 원숭이와 함께 있는 자화상을 통해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원숭이들은 마치 절친한 친구처럼 그녀를 안고 있을 때가 많다.

P.263
“당신에게 내 가엾은 장미꽃 얘길 듣고 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오. 다른 재난까지 덮칠까 심히 우려되오. 일본 작약에 덮개를 씌워줄 생각쯤은 했겠지?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건 명백한 살상 행위요. 내 온실을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오. 집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얼마나 기쁘겠소!”(1895년 3월 17일 산드비켄에서.) 이처럼 모네는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원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은 적이 없을 만큼 정원을 애인보다 더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창작의 힘>. 군더더기 없는 담백한 책 제목도, 제목에 온전히 충실한 책도 정말 오랜만에 만났다. 다만 참고문헌이 있었다면 이 책을 시작으로 더 다채롭게 예술에 접근해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명작이라는 이름이 뿜어내는 힘만큼 다가가기 힘든 게 미술이었다. 하지만 이젠 내 방문 문턱만큼은 아닐지라도 미술관 문턱을 조금 더 자연스럽게 넘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삶을 뜨겁게 사랑한 흔적을 남긴 이들의 창작의 힘에도 경의를 표하고 싶다.

책을 덮고 나면 자기 자신에게 묻고 싶어질 것이다. “네 삶을 만들어가는 힘은 무엇이니?”라고 말이다.



저자 : 유경희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시각예술과 정신분석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뉴욕대학교에서 예술행정 전문가과정을 수료했다.
‘유경희예술처방연구소’는 특별히 고대의 주술사들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아픈 사람들을 치유했던 것처럼,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영적·정신적으로는 더할 수 없이 피폐해진 오늘의 상처받은 영혼들에게 예술과 예술가의 삶을 입체적으로 들려주는 곳이다. 몇 해 전부터 중세미술 중에서도 로마네스크 미술과의 조심스러운 열애를 시작했다. 성스럽기 그지없는 겸손한 익명의 존재들을 어떻게 불러내 이름을 붙여줄까를 섬세하게 고민 중이다.
예술 그 자체보다는 예술가들의 기질과 성격과 취향에 더 관심이 많다. 그런 까닭에 그림보다 화가들의 감각적·심리적 삶에 더 집착한다. 예술을 통해 치유를 넘어선 성찰, 아름다움과 자유로움의 공존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칼럼을 연재 중이며 대기업과 미술관 등지에서 대중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예술가의 탄생』과 『아트 살롱』이 있다.

글, 사진: 땡스북스 손정승